그때 또 메시지 알람이 울린다. ‘XX여자중학교 3학년 2반 박소라. 지금부터 내 말 안 들으면 니 사진 학교에 뿌린다’. 덜컥, 겁이 난다. 상대의 요구대로 텔레그램을 설치하고 들어갔다. 상대는 내 주소와 아빠 휴대전화 번호까지 줄줄 읊는다. ‘옷 다 벗고 얼굴 가리지 말고 사진 찍어. 10초 안에 안 보내면 아빠랑 친구들한테 유포한다’.
10, 9, 8, 7…. 시간이 줄어들수록 머리가 새하얘진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땐 몰랐다. 사진이 수천 명이 있는 텔레그램 방에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은. 또 끝없이 가라앉는 수렁 속에 빠지게 됐다는 것도. 화제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다.
18일 공개된 ‘사이버 지옥’은 국내 넷플릭스 영화 순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외 반응도 뜨겁다. 26일 넷플릭스가 발표한 ‘글로벌 주간 톱 10’ 비영어 영화 부문에서 8위에 올랐다. 특히 홍콩·베트남 2위, 대만·싱가포르 3위에 오르는 등 아시아 국가에서 관심이 크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가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큐멘터리는 실제 N번방 사건을 추적한 불꽃추적단, 기자, PD, 형사 등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들여다본다. ‘갓갓’ 문형욱과 ‘박사’ 조주빈을 쫓는 것부터 시작해 이들이 검거돼 형을 받기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N번방 사건은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보도됐지만, 다큐가 보여주는 범죄 수법은 그간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고 끔찍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N번방 사건은 이제 끝난 걸까. N번방의 주범인 조주빈은 징역 42년형, 문형욱은 징역 34년형을 받는 등 대부분 중형을 선고받았다. 주요 피의자들을 붙잡았고 이들에 대한 재판도 마무리됐지만,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각성이 이뤄졌고, 이는 ‘N번방 방지법’과 같은 법률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사업을 하는 연 매출 10억 원 이상’ 또는 ‘일평균 이용자 10만 명 이상 인터넷 사업자’는 모두 불법 촬영물 여부를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N번방 사건이 벌어졌던 텔레그램이나 또 다른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으로 꼽히는 ‘디스코드’ 등 해외에 법인을 둔 사업자는 제외돼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디지털 성범죄는 뿌리 뽑히지 않고 오히려 꾸준히 늘고 있다. 대검찰청의 ‘2021년 검찰연감’에 따르면 2020년에 적발된 디지털성범죄사범은 1만6866명으로 1년 전 1만4380명보다 약 17% 증가했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를 통계로 산출한 2016년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그러나 기소율은 여전히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같은 해 검찰은 적발된 디지털성범죄사범 가운데 3249명을 정식 재판에 넘겼다. 정식 재판과 약식 재판을 합친 전체 기소율은 약 28%다. 검거된 디지털성범죄사범 10명 가운데 3명만 재판에 넘겨진 셈이다.
‘사이버 지옥’은 형태를 바꿨을 뿐, 온라인 공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다. 충격적인 사건의 실태에 작품 초반 감상을 포기했다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많은 이들이 사건의 실체를 알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우리에게 먼 이야기가 아니다.
최진성 감독은 “피해자분들에게, 추적자분들에게, 그리고 시청자분들에게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아무리 숨어도 ‘범죄자는 반드시 잡힌다‘라는 것”이라고 했다. 문형욱과 조주빈은 본인들이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언론과 수사기관을 조롱했다. 그러나 평범한 대학생들과 저널리스트, 경찰들의 끈질긴 추적이 이들을 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사이버 지옥’은 증명하고 있다. 범죄자는 반드시 잡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