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보건의료 분야 대응 방향을 제시하고 국가별 보건의료 정책 방향을 협의하는 세계보건총회(WHA, World Health Assembly)가 28일(이하 현지시간) 1주일 일정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세계보건총회는 전 세계 194개 회원국과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가 참여하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입니다. 올해 75차 WHA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21일부터 28일까지 열렸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후 3년만에 다시 대면으로 진행된 올해 행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주제가 ‘건강을 위한 평화, 평화를 위한 건강(Health for peace, peace for health)’이라는 점입니다.
코로나 대유행 시기였던 2020년 ‘코로나 대응’, 2021년 ‘펜데믹 종결, 그리고 예방’이었고, 코로나 이전 대면으로 열렸던 72차 WHA 주제는 ‘보편적 의료보장: 누구도 소외됨 없이’였습니다. 올해 WHO는 세계보건총회를 통해 ‘건강과 평화’라는 화두를 던진 셈이죠.
이유는 많습니다. 전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이라는 건강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초기 일부 국가에 한정된 백신과 치료제 보급, 저소득 국가에 대한 부족한 의료자원 공급, 감염병 대유행 시기 겪었던 혐오와 차별, 갈등, 불신 등이 원인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감염병 대유행 시기 국가별 이해득실에 따른 편 가르기와 분쟁 발생도 ‘건강과 평화’라는 주제가 등장한 이유가 아닐까요?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에수스 WHO 사무총장은 22일 개막연설에서 “코로나19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라며 “분열을 넘어 모두가 함께 할 때 성공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여전히 백신 접종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코로나19 변이 출현 가능성이 있고, 검사와 치료제 접근성 문제도 여전하다고 지적했죠.
특히 “최근 전쟁과 분쟁이 보건 분야에 미칠 영향이 크다”면서 평화가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제시했습니다.
WHO는 22일에는 전 세계에서 5000여 명 이상이 제네바에 모이는 ‘걷고 말하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보건의료 대응에 모두가 함께 하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이번 총회에서는 3가지 중요한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하나는 WHO 정책 결정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자금조달 방안이 의결이었고, 현 게브레에수스 사무총장의 재신임,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규탄 결의안 채택이었습니다.
WHO의 지속가능한 자금조달은 2030년까지 회원국의 분담금 비율을 최대 50%까지 늘리겠다는 것입니다. 현재 WHO의 194개 회원국의 분담금은 약 16% 수준입니다. 이를 2030년까지 50%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죠. WHO는 이를 통해 자금 지원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보건 비상사태 지원을 유연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보건 비상사태에 보다 적극적으로 WHO가 대응할 수 있도록 해, 특정 국가 입김에 좌우되지 않고 WHO 정책 결정의 자생력을 키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던 24일 게브레에수스 WHO 사무총장에 대한 재신임 투표가 진행돼, 유효표 160표 중 155표의 지지로 의결됐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게브레에수스 사무총장은 2027년까지 5년의 임기를 더 수행할 예정입니다.
‘건강과 평화’라는 주제에 맞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규탄 결의안도 채택됐습니다. 26일 찬성 88표, 반대 12표, 기권 53표로 ‘러시아 연방의 침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와 난민 수용 및 수용국의 보건 비상 사태’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된 것이죠. 핵심은 우크라이나 병원과 보건의료 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을 규탄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의료 접근성이 제한을 받고 건강권이 침해 받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WHO는 결의안에서 병원과 의료시설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다만 WHO의 규탄 결의안에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번 세계보건총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인 보건위기 대응에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코로나19 유행시기였던 2020년 5월 73차 세계보건총회에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초청연설자로 나서 ‘코로나 위기 극복’을 강조하며 전 세계인들의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연설에서 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코로나를 이기기 위해 선택한 ‘모두를 위한 자유’의 길을 소개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도전과 위기의 순간, 한국 국민들은 담대한 선택을 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모두를 위한 자유’로 확장시켰다”면서 “‘이웃’을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위험한 대상으로 여기고 봉쇄하고 차단하는 대신,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먼저 지켰다”면서 자발적인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참여 등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올해도 대한민국은 ‘평화와 건강’에 함께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단은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협력과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와 인권침해 등에 우려를 표하며 ‘건강을 위한 평화, 평화를 위한 건강’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대표단 수석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윤찬식 보건복지부 국제협력관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명 피해와 인권 침해, 보건의료 체계의 파괴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분쟁의 조속하고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평화와 건강은 근본적이고 보편적 인권이자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의 분쟁으로 인권이 침해되고 공급망이 파괴되며, 필수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는 북한 지원과 관련해 윤 협력관은 “북측이 수용한다면 백신, 치료제, 의료기기 등 필수적인 의료물품을 지원할 의향이 있음을 전하고, 북측의 호응을 기대한다”며 코로나19 종식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한국이 적극 동참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최근 아프리카 일부 지역 풍토병으로 알려졌던 원숭이두창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감염병 위기감이 감돌고 있죠. WHO에 따르면 5월초 시작된 원숭이두창 감염과 의심사례는 23개국에서 400여 명이 넘었습니다. WHO는 29일자로 원숭이두창에 대해 1단계 낮은 위험에서 2단계 ‘보통위험’ 수준으로 감염병 위험 단계를 올렸습니다. 이미 1970년대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 인간에 감염 사례가 나왔지만 치료제와 백신은 보편화돼 있지 않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내내 지적돼 왔고 경험했던 ‘보건의료 불평등’이 원인일까요? WHO를 포함한 다양한 세계 기구와 비정부기관 등은 감염병을 포함한 공중보건 비상사태에 대비해 국가, 이념, 인종, 지역과 무관하게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이들이 헌신과 노력을 기울여 왔죠.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자리한 독점과 무시, 편향된 이념, 혐오와 차별은 인류 보편적 권리인 건강권을 무너뜨리곤 합니다. 따라서 이번 세계보건총회가 제시한 의제 ‘건강과 평화’는 분열을 이겨내고 타협과 협력으로 평화를 추구할 때 전 세계적인 보건 비상사태에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