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아쉽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귀리를 거의 먹지 않아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트밀을 먹어본 적이 있다면 귀리를 먹은 것이다. 원래 오트밀은 귀리(oat)를 볶은 뒤 거칠게 부수어 죽처럼 조리한 음식이지만 지금은 보통 납작하게 누른 상태로 우유에 개어 간단한 아침으로 먹는다.
귀리의 연간 생산량은 약 2500만 톤으로 옥수수, 밀, 쌀, 보리, 수수에 이어 6위를 차지하고 있다. 귀리가 곡물 가운데 유일하게 건강식품으로 꼽힌 건 쌀과 보리의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볏과 작물 사이의 관계를 잠깐 살펴보자.
게놈의 DNA 염기 서열을 비교하여 볏과 작물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면 ‘밀, 쌀, 보리, 귀리’와 ‘옥수수, 수수’로 묶인다. 분류학을 몰라도 수긍이 갈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네 작물을 다시 두 그룹으로 나누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쌀’과 ‘밀, 보리, 귀리’다. 뒤의 세 작물을 두 그룹으로 나누면 ‘밀, 보리’와 ‘귀리’가 된다. 즉 귀리는 보리/밀과 사촌, 벼와 육촌, 옥수수와 팔촌쯤 되는 사이인 셈이다.
귀리가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된 가장 큰 이유는 베타글루칸을 비롯한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 있어 장 건강에 좋고 콜레스테롤을 흡수해 심혈관계 건강에도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만과 당뇨 등 대사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쌀밥만 먹는 것보다 귀리를 섞어 밥을 짓는 게 좋다.
물론 보리 역시 식이섬유 함량이 귀리에 버금가 비슷한 효과를 내지만 장이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곡물은 씨앗으로 여기에는 싹이 튼 뒤 광합성을 할 때까지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탄수화물(녹말)과 단백질, 지방이 들어 있다. 그런데 쌀과 귀리, 보리, 밀의 저장 단백질 종류가 다르고 이 가운데 보리와 밀의 저장 단백질인 글루텐이 일부 사람들의 장 면역계를 자극해 알레르기나 만성 염증을 일으킨다. 보리밥을 먹고 속이 불편한 사람은 아마도 글루텐 때문일 것이다.
지난주 학술지 ‘네이처’에는 귀리의 게놈을 해독한 논문이 실렸는데, ‘귀리가 특출나게 건강에 좋은 곡물인 이유를 게놈이 밝혀냈다’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귀리의 게놈 크기는 무려 110억 염기로 31억 염기인 사람 게놈보다 3배 이상 크다. 유전자도 8만여 개로 2만여 개인 사람보다 4배나 더 많다.
게놈 분석 결과 오늘날 귀리에 건강식품으로 명성을 안겨준 수용성 식이섬유인 베타글루칸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는 134개가 됐다. 이들 유전자 가운데 일부가 알곡이 여무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활성화돼 베타글루칸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패턴은 이미 게놈이 해독된 보리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다음은 저장 단백질 관련 유전자 분석으로 밀에서 특히 면역계를 자극하는 단백질로 알려진 알파-글리아딘과 오메가-글리아딘의 유전자가 귀리 게놈에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신 귀리에는 글로불린 단백질이 풍부한데, 이는 쌀과 비슷한 특성이다. 귀리의 게놈에는 보리의 장점 지닌 식이섬유 유전자와 쌀의 장점을 지닌 저장 단백질 유전자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벼(쌀)는 약 8000년 전 중국 양쯔강 지역에서 작물화가 일어났고 보리와 밀은 약 1만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서아시아에서 작물화됐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야생 귀리의 자생지로 무려 7000년 동안 귀리는 보리와 밀 농사를 방해하는 잡초였다. 그러다 약 3000년 전 인류는 귀리를 작물화해 재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으로 농업이 전파되면서 여름이 서늘하고 습해 다른 작물이 고전하는 지역에서도 귀리는 잘 자랐기 때문이다. 오트밀 역시 밀이 귀했던 스코틀랜드에서 먹던 빈자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건강식품이 됐다.
우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함께 해온 보리가 있지만, 보리밥을 먹으면 속이 불편해 꺼리는 사람들에게 귀리밥은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