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중남미의 정치 지형이 왼쪽으로 기울어 온 가운데, 유권자의 성향이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콜롬비아에서까지 좌파정권이 탄생하면서 사회 변화에 대한 중남미 유권자의 열망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현재 중남미 주요국이라고 할 수 있는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에는 이미 좌파정권이 들어서 있으며, 올해 10월 실시되는 브라질 대선에서도 중도좌파 성향의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하다. 이런 상황은 2000년대 중남미에서 좌파정권이 연쇄적으로 들어섰던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 시기를 연상케 하고 있다.
이렇게 중남미에서 좌파정권이 다시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 배경에는 악화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이 있다. ‘핑크 타이드’가 동력을 잃자 2010년대 들어 다시 차례로 집권하게 된 우파정권이 경제 침체 국면에서 불평등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2010년대 후반 중남미 국가에서 연이어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심화하는 불평등 문제에 대한 유권자의 분노가 표출된 결과였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소득분배와 빈곤 지표가 더욱 악화하고, 그나마도 두텁지 않던 중산층이 소득 하락에 직면하자 재분배를 중시하는 좌파로의 정권교체 여론이 힘을 얻은 것이다.
이런 여론은 2000년대 중남미에서 좌파집권 국가의 소득분배와 빈곤 지표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던 경험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정책의 실행 방식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핑크 타이드’ 시기 중남미 좌파정권이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통해 소득분배를 개선하고 빈곤율을 낮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베네수엘라와 같은 일부 국가에서 집권 좌파세력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행정부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도구로 재분배 정책을 활용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왼쪽으로 쏠리고 있는 중남미의 정치 지형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나라는 미국일 것이다. 미국은 중남미 정세가 자국의 이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중남미에서 영향력 유지를 꾀해왔다. 그런 미국에 신자유주의 경제발전 모델 수정을 공언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지나친 대미 의존도를 경계하는 좌파정권의 연이은 탄생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당장 미국 바이든 정부가 중남미에서 도모하고 있는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 불법이민 문제 해결을 위한 역내 협력, 비민주주의 국가와 러시아에 대한 조율된 제재 등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역내 좌파정권을 중심으로 제기될 수 있다. 올해 6월 초 미국에서 열린 제9차 미주정상회의 개최 과정에서의 각국 정상의 참석 여부를 둘러싼 불협화음, 일부 정상의 불참, 회의 도중 나온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은 중남미 국가에게 미국이 더는 대항할 수 없는 패권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였다.
미국의 또 다른 골칫거리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핑크 타이드’ 국면에서 발생한 역내 지정학적 변화와 미국의 리더십 공백을 틈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남미 국가와의 협력 수준을 끌어올렸다. 중국이 좌파정권과 손잡고 불과 20여 년 만에 중남미에서 유력한 역외 세력으로 떠오른 것을 경험한 미국으로선 최근 역내 좌파정권 확산세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중남미의 지정학적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와 기업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역내 상황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남미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작금의 ‘좌파 물결’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자원 확보 활동, 투자, 무역협정 협상 등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역내 미·중 경쟁 구도 변화와 그에 따른 우리나라의 대중남미 외교에 대한 파급효과 역시 자세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