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치료했던 의사의 집에 찾아가 흉기를 휘두르고, 응급실을 찾은 환자의 보호자가 의료진 멱살을 잡거나 때리고, 술에 취한 환자나 보호자가 의료진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어디선가 보신적 있으시다고요?
의학 드라마나 혹은 병원 장면이 나오는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 중 하나입니다. 일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폭력배들이 의료진을 겁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건 영화나 드라마 속 ‘픽션’이 아니라 2022년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 ‘논픽션’입니다.
지난 2018년 12월31일 강북삼성병원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자신이 진료하던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고(故) 임세원 교수. 조울증을 앓고 있던 A씨가 흉기로 위협하는 상황에서 “도망가”라며 간호사들을 피신시켰으나 임 교수는 A씨를 피하지 못했죠. 유가족의 행정소송을 통해 법원으로부터 임 교수는 의사상자로 인정됐고, 올해 4월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당시 사회적 파장은 컸습니다. 폭언 및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의료진 보호를 위해 폭력 행위자에 대한 처벌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2019년 국회는 의료진 폭행 시 처벌 수위를 강화한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 일명 ‘임세원법’을 제정했습니다. 임세원법에는 의료진 폭행에 대한 처벌강화, 의료기관 내 보안장비 및 보안인력 배치 의무화,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처벌을 경감해주는 ‘주취 경감’의 의료인 폭생 시 미적용 등이 담겼습니다.
구체적으로 의료기관에서 의료인을 폭행해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10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상 7000만 원 이하 벌금, 중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3년 이상 유기징역,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 5년 이상 또는 무기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의료진을 향한 환자와 보호자들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용인 모 병원에서는 환자 보호자가 휘두른 낫에 의사가 목을 다치는 살인미수 사건이 발생했고, 부산에서는 진료 절차에 불만을 품은 남성이 술에 취한 채 응급실에서 방화를 시도했으나 의료진의 빠른 대처로 더 큰 사고를 막았습니다.
2022년 이전으로 거슬로 올라가면 의료진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2019년 10월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흉기 난동에 의해 의사의 손가락이 절단된 사건, 2008년 6월 모 병원 의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신의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의료진에 대한 폭언과 폭력이 얼마나 발생하고 있을까요? 실제 발생 사건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짐작이 가능합니다.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가 2019년 11월6일부터 10일까지 의사 대상 폭력 발생 현황을 조사한 결과, 최근 3년 동안(응급실 제외) 환자 및 보호자 등으로부터 폭언과 폭력을 경험한 의사는 71.5%로, 이중 15%는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한 보건복지부와 대한병원협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2019년 1월 4째주부터 3월 2째주까지 ‘안전한 진료환경 관련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 의료기관 7290개(전체 10.3%) 중 최근 3년(2016~2018년)간 의료기관 내 폭행 사건 발생비율은 병원이 11.8%, 의원 1.8%였습니다.
원인은 다양합니다. 의협 조사에서는 폭력 원인으로 진료결과에 대한 불만(37.4%), 진단서, 소견서 등 서류 발급과 관련된 불만(16.0%) 등이었습니다. 복지부 조사에서 병원의 경우 환자 또는 보호자 주취상태(45.8%), 의료인의 진료 결과에 대한 불만(20.3%)이 가장 많았고, 의원은 진료결과 불만(35.6%), 환자 또는 음주상태(22.2%)로 조사됐습니다.
최근 조사도 있습니다. 지난달 의료기관 폭력사건 발생 후 의협신문이 6월28일부터 30일까지 1206명의 의협 회원을 대상으로 긴급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최근 1년 이내 환자나 보호자에게 폭언 또는 폭행을 당한 경험한 의사가 78.1%였습니다. 조사 대상의 47.3%와 32.1%가 ‘1년에 1~2회’와 ‘한 달에 1~2회’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고 답했고, 11.2%와 1.7%가 ‘1주에 1~2회’와 ‘매일 1~2회’라고 응답해 의료인 대상 폭력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됐죠. 이에 대해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는 “응급실이 안전하게 느껴지는지 묻는 문항에 ‘불안하다’와 ‘매우 불안하다’가 총 56.2%였다. 생명을 지키는 공간에서 해를 가하는 행위가 이뤄지고, 그로 인해 회원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현실이 참담하다”고 말했습니다.
처벌을 강화했음에도 왜 의료진에 대한 폭행은 계속되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대다수 의료전문가들은 법에 명시된 규정보다 폭력 행위자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는 점을 꼽습니다. 이와 관련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법조·의료인력에 대한 보복성 폭력행위 방지대책 긴급토론회’에 주제발표자로 참석한 김현 대한응급의학회 기획이사 발표에 의하면 의료진 폭행 관련 주요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 대다수는 벌금형에 그쳤습니다. 따라서 의료전문가들은 처벌 강화를 골자로 의료진에 대한 폭력행위를 막기 위한 법적·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꾸준히 강조해 왔습니다. 즉 ‘폭력은 무관용’ 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토론회에 참석한 전성훈 의협 법제이사도 “진료 중인 의료인에 대한 폭행·협박은 반드시 처발되며, 특별하게 처벌되는 중한 범죄라는 메시지를 사회에 명확히 전달해, 의료인에 대한 공격적이고 불법적인 의사표시 자체를 경감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의료인에 대한 가해행위 처벌 조항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규정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성필 대한병원장협의회 기획이사는 “의료기관 내 폭력 행위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환자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면서 △의료기관 내 폭력 행위에 대한 엄벌 △반의사 불벌죄 조항 삭제 △별도의 응급실 및 외래환자에 대한 안전관리료 신설 등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김현 이사도 응급실 폭력 대책으로 △의료기관 보안요원의 쌍방폭행 문제 해결을 위한 현장대응 관련 법 개정 △반의사불벌죄 폐지 △신고의무화와 엄정한 법집행 △언론·사회단체 등의 인식전환 노력 △의료진 적극적인 법적 대응 등 자세변화 △의료기관 차원의 법적 대응 △모니터링시스템 구축 및 추적관찰 등을 꼽았습니다.
의료전문가 단체들의 목소리도 동일합니다. 최근 발생한 의료진 폭행에 대해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입장문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안전한 진료환경이다. 우리가 지금 좌절하고 힘든 부분은 너무나도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은 원래 있어왔던 사건들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이라며 관계 당국이 지금이라도 제발 움직여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의사협회도 입장문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더 이상 야만적인 폭력범죄가 공익적 의료현장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즉각적인 중재안과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작동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죠.
우리는 지난 2년 여 동안 코로나19로 의료현장 곳곳에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왔고, 지금도 환자 곁을 지키는 의료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는 의료진들이 폭언 및 폭행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사회가 그리고 국민들이 지켜줘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