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2013년 4분기(1019조405억 원)부터 시작했던 가계부채 ‘1000조 시대’가 시장의 예상보다 빠르게 저물 수도 있다. 어쩌면 ‘2000조 시대’에 진입하자마자 ‘3000조 시대’를 준비해야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고제헌 주택금융공사 주택금융연구원 연구위원,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지난해 대통령 직속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에 제출한 ‘주택 전월세 보증금 규모 추정 및 잠재위험 분석’ 보고서에서 2020년에 국내 전세·준전세 보증금 부채는 851조 원으로 추정 집계했다. 올해 1분기 가계신용(가계부채로 통용) 수치인 1859조 원에 단순 계산으로 더하면 그 숫자는 2700조 원대에 이른다.
김세직 교수팀의 연구 수치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현재 가계부채 통계에는 주택 임대차와 관련된 통계가 제외돼 있다. 다수의 전문가는 해외 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국내 주택시장에서는 활발하게 거래되는 주택 임대차(전세 등) 거래에서 오가는 돈 역시 가계부채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미국, 영국 등을 중심으로 ‘증거(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을 결정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가계부채 정책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통계가 필요한 상황이다.
김세직 교수와 고제헌 연구위원은 2018년에 공동 집필한 ‘한국의 전세금융과 가계부채 규모’ 연구 자료에서도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주택 임대차와 결합한 가계 간 금융 거래를 통해 발생되는 가계부채가 대규모로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전세는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세입자로부터 빌리고,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을 빌려주는 금융거래’로 설명하며 가계 간 직접 부채 형태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자영업자 대출 중 상당 부분도 가계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는 9월에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조치가 해제될 경우 약 140조 원(올해 1월 기준)을 상회하는 대출원리금에 대한 상환 압박이 소상공인 자영업자에게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 사실상 이는 개인이 갚어야 할 부채이다.
금리 상승 속도와 폭이 가파르면서 대출 금리도 8%에 육박하고 있다. 은행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한 집주인이 늘어나면서 집이 경매로 넘어가 전세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금리와 차주의 경제난, 주택시장 불안정이 겹치면서 주택 임대차와 관련된 가계부채 통계에 더 이목이 쏠리는 배경이다.
김세직 교수팀은 “가계금융 공급 채널로서의 성격을 갖는 전세 및 준전세 제도가 전체 세입가구의 90%나 차지할 정도로 널리 확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총량 추정 및 관리를 위해서는 금융기관의 가계신용 이외에도 전세 및 준전세 보증금 규모 추정과 관리를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