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미·중이 가장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분야가 반도체다. 패권 다툼에서 가장 크게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고, 미국이 중국 봉쇄를 위해 힘을 쏟고 있는 공급망 재구축의 핵심이다. 미국의 ‘칩(chip)4 동맹’ 전략이 그것이다. 미국은 반도체 원천기술과 설계기술의 종주국으로 최다 특허를 보유하면서 표준을 지배한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고의 개발과 제조능력으로 세계 메모리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절대 강자다. 대만은 팹리스(설계전문 기업)의 위탁생산에 특화한 TSMC가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과거 ‘반도체 왕국’이었지만, 한국과의 ‘치킨게임’에 밀려 생산능력을 잃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취약한 필수 소재와 장비, 부품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반면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요처다. 반도체 ‘굴기’를 위해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아직 기술력이 떨어지고 자급할 수 있는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 미국은 한국·일본·대만과의 ‘칩4 동맹’으로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해 중국의 추격을 차단한다는 그림이다.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한국의 참여 여부에 대한 조속한 입장 정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예비회담이 예정돼 있다. 중국은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의 칩4 동맹 참여는 상업적 자살행위가 될 것”이라는 겁박까지 불사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은 이미 칩4 네트워크에 들어가기로 했다.
반도체는 ‘현대 산업의 쌀’이다. 지금 인류의 일상에서 먹고 입는 것 말고 반도체가 쓰이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전자기능을 갖는 모든 제품, 기기, 장치, 생산설비에 들어간다. 반도체가 영향을 미치는 경제규모는 전 세계 총생산(GDP)의 40% 이상이라고 한다. 앞으로의 대세인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로봇과 드론 등 4차 산업혁명도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다. 반도체 없이 전쟁수행을 위한 첨단무기도 움직일 수 없다.
반도체가 곧 경제이자 국방안보의 핵심인 것이다. 중국의 무력침공 위협에 놓인 대만을 지키는 최고의 무기가 다름 아닌 TSMC라고 하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실리콘 방패론’이다. 우리에게 최대 반도체 생산업체인 삼성의 존재가 한반도 전쟁의 가장 큰 억지력이라는 얘기도 지나치지 않다. 반도체를 먹고 사는 차원을 넘어 ‘죽고 사는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미국 또한 지정학적(地政學的)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한국과 대만에만 반도체 공급을 맡겨놓을 수 없다는 안보와 산업생태계의 위기감이 커졌다. 칩4 동맹의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은 520억 달러의 막대한 직접 지원과 시설투자 보조금 지급, 파격적 세제 혜택을 골자로 한 반도체산업육성법을 만들었다. 한국과 대만의 뛰어난 제조능력을 자국에 끌어들이고 일본과의 기술협력으로 다시 반도체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본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과 차세대의 양자(量子) 컴퓨터 등에 들어갈 최첨단 반도체 공동연구 및 제조에 합의했다. 우리가 선점해야 할 기술이다. 칩4 동맹을 반도체 부활의 기회로 삼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뚜렷하다.
중대한 결단의 순간인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보일 때가 아니다. 우리가 칩4 동맹에 참여하는 것 말고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다. 물론 사정은 복잡하고 위험 또한 크다. 한국 반도체 수출의 60%가 중국에 들어간다. 중국은 또 한국 전체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의 보복이 우리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 공포를 키운다. 그러나 이 딜레마는 대량의 반도체 수요를 한국에 기대는 중국에도 심각한 취약점이다. 경제보복이 최악의 충돌로 치닫는다면 중국도 경제와 산업의 큰 혼란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도체는 우리 경제와 안보에서 대체할 수단을 찾기 어려운 핵심 전략자산이다. 우리가 확보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압도적 영향력은, 중국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을 넘으며 미국을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다. 신냉전으로 세계 경제안보 질서의 새로운 판이 짜인다. 칩4 동맹은 우리가 당당한 원칙과 주도적 입지로 국익을 키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도체를 게임체인저(game changer)로 삼기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은 기술과 시장지배력의 초격차다. 그것이 중국이 함부로 흔들 수 없는 힘이고, 미국이 한국에 기대게 만드는 불가결(不可缺)한 가치다. 대한민국 생존이 걸린 문제다. kunny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