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길거리 예술가 뱅크시가 내놓은 단순한 화풍의 ‘풍선과 소녀’가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의 마지막 예술품으로 등장한다. 86만 영국 파운드(한화 약 13억 5000만 원)에 낙찰된 순간,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다. 경매봉을 두드리자마자 액자 하단에 숨겨진 파쇄기를 통해 내려온 그림이 갈갈이 찢겨나간 것이다.
뱅크시의 계획된 퍼포먼스였다. 미술 작품이 ‘얼마’에 팔릴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경매장에서 구매자의 돈을 곧장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신선한 사건은 ‘영국에서 가장 도발적인 불법 예술가’로 알려진 뱅크시의 성격과 지향을 잘 보여준다.
11일 개봉하는 ‘뱅크시’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가늠해보게 하는 다큐멘터리다. 뱅크시 전기 작가, 함께 작업한 동료 예술가, 동시대 예술을 향유한 평론가의 촘촘한 증언을 통해서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뱅크시는 단순한 그림과 쉬운 문장으로 완성한 길거리 예술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0년대 영국 경제 불황과 1980년대 대처 집권기를 거쳐 노동자 계층과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이 지속되던 시기다.
뱅크시와 함께 활동한 스티브 라자리데스(Steve Lazarides)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은 사람들을 겁먹게 해요. 하지만 이건 이해가 쉽고 ‘내 것’이라는 느낌이었죠. 날 바보 취급하지 않은, 내가 좋아할 예술인 거죠”라고 설명한다.
이라크 전쟁에 영국군을 파견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비판하는 시위에서 곧잘 쓰였던 문구 ‘잘못된 전쟁(Wrong War)’도 그의 손 끝에서 나온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 장벽에는 ‘장애물 뒤 낙원’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식으로 세상에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 모든 길거리가 그의 진실한 무대였다면 뉴욕, 런던, 파리의 유명 미술관은 미술계에 경종을 울리는 퍼포먼스의 장이었다. 미술관 허락 없이 자기 그림을 걸어 두는 불법행위를 일삼았는데, 대번에 발각되는가 하면 때로는 한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미술관에 걸려있다는 이유로 권위를 획득한 작품을 정작 아무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셈이다.
종종 너무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는 역사 선생님같은 느낌도 들지만, “작품을 정당화하려고 미술관에 갈 순 없다”던 뱅크시의 정체성을 ‘뱅크시’만큼 잘 정리한 다큐멘터리도 없을 것이다.
11일 개봉, 러닝타임 11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