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가 이끌던 통합정부 ‘친러·반러’ 갈등에 붕괴…우파 연정 출범 땐 EU와 대립 가능성
여러 가지 안 좋은 조건이 결합해 초대형 태풍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점차 경제나 다른 분야에도 적용돼 개별적인 악조건이 모여서 최악의 위기를 야기함을 뜻한다.
정치는 물론 경제·외교 불확실성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유럽’이다. 지금까지 616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폴란드와 독일 등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러시아가 가스공급을 무기로 사용하면서 공급량을 점차 줄여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다. 곡창지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급감해 식량 가격도 치솟았다. 그런데 지난달 21일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가 사임했다. 사임에 따른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EU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듯하다.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 및 외교에도 영향을 미쳐 최악의 경우 유럽에 퍼펙트 스톰을 부를 수도 있다.
드라기가 이끌어온 통합정부는 러시아 정책을 두고 분열했다. 급진좌파로 통합정부에 참여해 온 오성운동은 친러정책을 요구한 주세페 콘테 당수와 반러정책을 내세운 루이기 디 마이오 전 당수가 몇 달간 격돌하면서 6월에 당이 갈라졌다. 콘테 당수는 드라기의 반러정책을 비판해왔고 이를 빌미로 물가 급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중하층 시민에게 대폭적인 지원을 요구했다. 결국 드라기 총리는 통합정부 전체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하나가 돼야 한다며 신임을 물었는데 우파인 (북부)동맹과 전진이탈리아당이 신임투표에 불참하자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통합정부에 참여했던 북부동맹과 전진이탈리아당은 자당 중심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지자 드라기를 퇴출시켰다(통합정부의 세부 내용은 2021년 9월 9일 ‘유러피언 드림 12. 브라보! 슈퍼 마리오’ 참조).
지난해 2월 중순 총리가 된 드라기는 이탈리아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경제개혁을 추진해왔고 영국의 EU 탈퇴로 EU에서 독일, 프랑스와 함께 주요 3개국(‘빅스리’)이 되어 리더십을 행사해 왔다.
특히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에 신속하게 무기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도적 피해를 줄이고자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 협상을 통한 평화를 촉구했다. 6월 중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 드라기는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했다. 빅스리는 무기와 인도적 지원 등을 약속하면서 젤렌스키와 러시아와의 대화를 통한 휴전 등도 심도 있게 이야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ERF 2000억 유로 지원 최대 수혜국
9월 25일 이탈리아에서 총선이 치러진다. 각 당은 무더위를 헤치고 각 정당이 선거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여론조사에 따르면 신파시스트 정당인 극우 이탈리아형제당이 24%로 지지율에서 선두를 달린다. 북부동맹과 전진이탈리아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3당이 과반이 돼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중도좌파 정당들은 분열돼 설령 총선에서 선전한다 해도 연정 구성이 불투명하다.
문제는 우파 정당의 대러시아 정책이다. 이탈리아형제당은 아직까지 반러정책을 유지하지만 북부동맹과 전진이탈리아당은 매우 친러적이다. 러시아가 겨울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고 여론의 향배가 바뀐다면 이들 세 개 정당은 EU가 유지 중인 대러 강경정책의 단일대오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하나는 이들 우파 정당들은 EU와 대립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EU 27개국은 1년 전 7500억 유로(약 1000조 원)의 경제회생기금(ERF)을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여기에서 약 2000억 유로를 지원받아 최대 수혜국이다. 그런데 모든 회원국들은 이 수혜 기금의 3분의 1 정도를 기후위기 대응 등에 지출해야 한다. 1년에 한 번씩 지출 계획을 제출해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집행계획도 점검을 받는다.
獨·佛·伊 빅3 대열서 이탈할 수도
드라기 총리는 경제개혁에 앞장서 ERF의 지원을 받아 예산을 집행했다. 그러나 우파 정당들은 ERF의 기존 지원 조건을 준수하기보다는 표를 얻기 위해 서민 지원에 더 돈을 풀려고 한다. 9월 25일 총선 후 이탈리아에서는 두 달 정도 지나 정부가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대로 우파 정부가 구성된다면 이들은 EU와 각을 세워 대립할 것이다. 빅스리가 힘을 합쳐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하는데 이탈리아가 여기에서 이탈하는 셈이다.
드라기 총리 사임 직전과 직후 10년 만기 이탈리아 국채와 동일한 독일 국채의 금리 격차가 2.5%포인트로 벌어졌다. 독일 국채는 EU 금융시장에서 하나의 벤치마크로 기능한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에 곧바로 영향을 미쳐 기관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이탈리아 국채를 매입한다. 드라기 총리가 취임해 경제를 잘 운영하던 지난해 평균 국채 금리와 비교해 무려 2배 정도 올랐다.
러 가스 공급 차단 땐 갈등 증폭
우크라이나 전쟁은 점차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과 EU의 군사 지원이 최고조에 이를 올가을 전선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다. 11월 8일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다수당이 된다면 대러시아 정책도 균열을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는 공세를 강화해 러시아 침략으로 빼앗긴 돈바스 등 동부지역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 휴전협상에 나설 명분이 생긴다. 반면 푸틴은 서방의 제재에도 버티며 웬만해서는 협상장에 나오려 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이 전쟁이 한국전쟁처럼 수년간 지속할 수 있다는 분석이 더 많다.
이럴 경우 푸틴은 올겨울에 EU 회원국에 공급하는 가스를 차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러시아는 독일에 제공하는 가스를 전쟁 발발 전의 20%로 줄였다. 러시아는 이처럼 가스를 무기로 사용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등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높은 회원국들을 압박해 왔다. 러시아는 에너지를 무기로 미국과 긴밀한 공조를 보여온 EU 회원국들을 분열시키려 한다.
러시아가 12월부터 가스를 차단한다면 EU 회원국들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EU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독일은 2023년 경제성장률이 최소 -3~-5% 정도 급락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경제침체는 나머지 EU 26개 회원국들에 영향을 미쳐 EU 경제는 -1~-3% 정도로 급강하할 것으로 투자은행 ING는 추정했다. EU의 1, 2위 통상 파트너는 중국과 미국이다. EU의 경기침체는 중국과 미국에도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도 직격탄을 안길 것이다.
‘푸틴 응징’ 주전파 對 ‘휴전’ 주화파
EU 시민들은 과연 가스 공급이 안 되는 추운 겨울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6월 중순 유럽외교협회(ECFR)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와의 휴전을 통한 조속한 평화체결에 찬성하는 사람의 비율이 35%로 푸틴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주전파보다 12%포인트 높았다. 혹한의 겨울이 닥친다면 주화파의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ECFR 조사에 따르면 이탈리아 시민들의 52%가 조속한 평화를 원해 푸틴 응징을 원하는 측보다 거의 3배 정도 높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에너지 공급의 차단은 유럽에 경제적 위기와 함께 지정학적인 갈등을 야기해 ‘퍼펙트 스톰’을 몰고 올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 주화파의 목소리는 커질 터이고, 폴란드와 발트3국 등 주전파와 이들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최상을 바라지만 최악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다. 불확실성이 치솟는 유럽의 상황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면서 대비해야 한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셜록 홈즈 다시 읽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