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우 IT중소기업부장
해방 직후 김기림 시인이 쓴 ‘새 나라 송(頌)’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9년 8·15 경축사에서 반일 메시지 대신 이 구절을 인용했다. 그해 일본은 “전략물자의 부정한 유출”이라는 근거도 없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반도체 핵심 부품 등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했다. 때문에 문 전 대통령이 강력한 대일본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는 예상이 컸다. 그러나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한다면 자유무역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다”면서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고 우회적으로 심정을 표현했다. 일본을 안보와 경제협력의 파트너로 보고 미래를 열어 가자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만 일본이 경제보복으로 대한민국을 흔들려고 시도하면 경제력을 키워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경제에서 주권이 확고할 때 우리 운명의 주인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면서 “부당한 수출 규제에 맞서 책임 있는 경제 강국을 향한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난달 1일,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수출 규제를 시행한 지 3년째를 맞았다. 조용한 국내 언론과 달리 일본에서는 “한국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의 국산화 작업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문 정부가 소부장 산업 국산화 추진을 위해 연간 2조 원 규모 연구개발 지원 예산을 투자하는 등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고 평가했지만, ‘탈(脫)일본화’는 진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현재 진행형이다.
반도체는 미국과 중국 경제 분쟁에서 산업화의 ‘핵(核)’무기가 된 듯하다. 반도체를 장악한 나라가 경제·기술·군사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때가 국지전이었다면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전면전의 초입에 들어선 형국이다. 동북아 3개국에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이른바 ‘칩(Chip)4’까지 제안했다. 칩4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 대만에 제안한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다. 칩은 반도체를, 4는 동맹국 수를 의미한다. 동맹국 간 반도체 협력을 강화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구상에서 나왔다. 강력한 경제 안보 동맹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미국은 퀄컴과 엔디비아 등 반도체 설계, 펩리스 분야에 강점이 있다. 한국과 대만은 삼성전자와 TSMC가 반도체 위탁생산, 파운드리 분야 세계 1·2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시장 구조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분야에 강점이 있다. 이런 네 나라가 협력해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일본과 대만을 놓고 봤을 때, 동맹이란 의미를 놓고 모순에 빠졌다. 일본이 반도체 핵심 부품에 대해 경제 보복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칩4라는 동맹의 울타리는 무엇일까. 또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 1·2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시장 구도에서 협력이 가능할까. 우리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두뇌로 불리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 패권을 놓고 대만과 격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AP는 CPU, GPU, 통신칩 등 모바일 기기를 구동하는 핵심 반도체를 모아놓은 칩이다. 이에 경제보복과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경쟁하는 국가를 대상으로 칩4는 우리에게 무슨 이득을 줄 것인가. 1차원적인 질문에서 막혔다.
칩4는 국가 간의 협의체다. 만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칩4가 협약 형태로라도 정부 간에 맺어지게 된다면, 꼼짝없이 여기에 따라야 한다. 중국의 반응은 뒤로하고도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이득이 경제 보복과 시장 경쟁이라는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포섭할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칩4에서 반도체 산업의 ‘설계-부품-생산’이라는 순환 시스템을 갖고 있는 국가들이 동맹이라는 협약으로 뭉칠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도체를 놓고 시장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국가들의 집단이다. 국익을 위해서 어차피 들어갈 수밖에 없는 동맹이라면, 우리는 ‘경쟁’이라는 읽힘을 잊지 말아야 한다. a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