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을 거듭하던 국회가 지난 1일 문을 열면서 민생법안 처리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지만 여야 모두 ‘사법 리스크’에 갇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정상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내분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한 채 법원만 바라보는 상황에 놓였고 야당은 이재명 대표를 지키려 ‘방탄 의원단’을 자처하고 나섰다.
정기국회 개원 첫 날인 지난 1일 국민의힘은 “국민을 통합하고 민생경제를 회복하며 미래 도약을 준비하겠다”며 정기국회 ‘100대 입법과제’를 발표했다.더불어민주당은 역시 4일 “유능한 민생정당을 만들어 내겠다”며 정기국회 내에 통과시킬 ‘22개 민생입법과제’를 공개했다. 하지만 양당 모두 지도부가 사법 리스크에 휩쓸린데다 이를 돌파할 수단으로 정책 대신 정쟁을 선택하면서 민생은 뒷전이 되고 있다.
지난 5일 국회 논의가 불발된 ‘K-칩스법’이 대표적이다. ‘K-칩스법’은 반도체 특별법(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과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안 등으로 구성됐다. 특히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지난달 4일 대표발의한 반도체 특별법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등 국내 대표기업들의 핵심 사업과 직결돼 있어 윤석열 정부가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추진하는 민생법안이다. 국민의힘도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삼성전자 출신 반도체 전문가인 양 의원을 위원장으로 영입하는 등 입법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날 열린 1차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에서 반도체 특별법은 상정조차 안됐다.산업자원통상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은 이날 회의에서 계량에 관한 법률 개정안, 전기안전관리법 일부개정안 등을 논의했지만 반도체 특별법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해당 법안에 패스트트랙 등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법안에 요구되는 기본적인 숙려 기간을 지켜야 한다”며 상정을 거부했다. 이날 논의가 불발되면서 여야 간사는 일단 오는 19일 전체회의에 반도체 특별법을 상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회안팎에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 등으로 여야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 제대로 논의가 이뤄질 지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주택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도 추석 전 처리는 사실상 물 건너간 분위기다. 종부세 비과세 기준(기본 공제 금액)을 현행 공시가 기준 11억원보다 높게 올리고 공정시장가액 비율은 낮추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당초 7일 처리가 기대 됐지만 여야 모두 어수선한 내부 사정으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민의힘 간사를 맡고 있는 류성걸 의원은 6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신동근 의원과 회동을 가진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일(7일)은 아무래도 (법안 처리가) 시간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미 새 법률을 통한 종부세 완화는 데드라인이 지났지만 정부는 뒤늦게라도 법률 개정이 이뤄지면 환급 등을 통해 세금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법안 처리가 계속 미뤄지면서 이 마저도 불투명해진 상태다. 여야가 합의한 다음 본회의 개최일은 이달 27일이다. 그 전에 합의가 이뤄진다면 법 개정을 통한 연내 환급이 가능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일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