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The Buck Stops Here

입력 2022-11-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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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부 정일환 부장. 조현호 기자 hyunho@

“저는 이번 청문회가 왜 911비극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재발을 막을 수 있는지 우리 미국민들이 보다 나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환영합니다. 또한 이번 청문회를 통해서 911테러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분들과 TV를 보고 계신 시청자 여러분, 정부가 국민을 실망시켰습니다. 국민을 지켜야하는 우리가 실패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언론인을 꿈꾸던 젊은이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던 전설의 미드 ‘뉴스룸(NEWSROOM)’ 중 유독 뇌리에 깊게 각인된 장면이 있다.

2004년 3월 24일, ‘News Night’ 앵커인 윌 맥어보이는 911테러가 일어났을 당시 대테러위원회를 이끌었던 리차드 클라크 전 백악관 테러담당조정관의 미 의회 청문회 생중계 장면을 내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저 순간을 사랑했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클라크는 이날 결과분석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한 뒤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현실과 드라마를 절묘하게 버무린 연출 솜씨 덕분인지 이날 뉴스룸 에피소드는 '천조국의 위엄'이 부럽기만했던 장면으로 기억에 남았다.

당시 청문회는 911테러가 발생한지 2년 6개월이나 흐른 뒤였다. 그런데 미 의회나 미국민들 중 어느 누구도 클라크에게 긴 시간동안 어디에 숨어 무엇을 했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맥어보이의 앵커 멘트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정부를 칭찬하고 클라크에게 박수를 보냈다.

미국인들은 이날 청문회를 지켜보며 클라크가 사태가 발생한 뒤 몇 년간 조용히 지내다 그제서야 청문회에 나온 이유는 911테러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확실한 재발 방지책을 세워야했기 때문임을 이해했다. 책임 회피와 부실한 사과로 비난에 시달리던 부시 대통령은 청문회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286명의 선거인단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존 케리 후보를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절대권력자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했다며 머리를 숙이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이런 식이다.

“그분이 떠내려갔거나 혹은 월북을 했거나 거기서 피살된 일이 어떻게 정권의 책임입니까?” 서해에서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사살한 사건에 대해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했던 말이다. 북한을 규탄하는 것은 몰라도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는 주장은 무책임한 정쟁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야심한 밤 북한이 코 앞인 바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두고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도 취침하러 갔다는 의혹도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밤을 새느냐며 반박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대통령 탓을 하느냐는 말은 이때 처음 들은 게 아니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는 "해상에서 배가 침몰하는데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반발했다. ‘7시간’ 행적에 대한 의문은 정치공세로 치부했다.

‘아무 책임 없다’던 두 전직 대통령은 공통분모가 하나 더 있다. 그들은 다음 대선에서 정권을 뺏겼다.

"내 책임 아님"을 주장하던 국정 책임자들의 뒤를 이은 새 대통령은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했다. 선거기간엔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유명한 명패를 내걸기도 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 윤석열 대통령이 ‘내 탓이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자 현직 대통령이 곧바로 사과한 사례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9년 '씨랜드 화재' 발생 다음날 대국민 사과를 했다. 화재 원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국민들이 생명을 잃은 것은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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