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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으로 영혼까지 산산이 부서진 여자, 문동은(송혜교 분)의 대사는 건조하면서도 치밀하다. 온 생을 걸어 복수를 꾸민 만큼, 가해자들을 향한 압박은 조심스럽고 진중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창 시절 소위 ‘잘 나가는’ 무리에게 학교폭력을 당해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문동은이 복수를 펼쳐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지난달 30일 공개된 후 이틀 만에 넷플릭스 한국 TOP 10 랭킹 1위를 차지했고,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 전 세계 5위(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 제공, 2일 기준)를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더 글로리’는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 다수의 히트작을 써낸 김은숙 작가의 첫 복수극이자 첫 청소년 관람 불가 작품이다. 멜로에 특화된 김 작가인 만큼, 그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장르물’에 눈길이 쏠리던 상황. 여기에 송혜교·김 작가의 재회, 안길호 감독의 연출, 학교폭력 피해자가 복수에 나서는 서사 등 많은 요소로 공개 전부터 화제를 빚었다.
기대 속 공개된 ‘더 글로리’ 속 폭력은 더 무자비했고, 송혜교의 얼굴은 더욱 서늘했다.
고등학생이던 문동은(정지소 분)은 박연진(신예은 분)과 그 무리에 집요한 학교폭력을 당했다. 이유는 하나다. 무리의 장난감이었던 윤소희(이소이 분)가 전학 갔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깃거리가 된 문동은은 집요한 폭력의 피해자로 추락했다.
일회적인 폭언·폭행이 아니었다. 맨살을 고데기로 지지는가 하면, 목을 조르고 , 강제로 입을 맞추는 등 악랄한 행위가 고스란히 담겨 눈을 질끈 감게 한다. 문동은은 폭력에 저항했고, 학교와 경찰에 도움을 요청 했다. 그러나 고과에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한 교사는 “친구들끼리 한 대 때릴 수도 있는 것”이라며 큰소리치고, 도리어 문동은의 뺨을 때렸다. 경찰은 그런 교사가 있는 학교에 다시 모든 걸 일임하고, 문동은의 엄마조차 가해자의 부모가 준 돈을 받고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다. 문동은은 폭력 한가운데 방치됐다.
가해자들에게는 실낱같은 죄책감도 없다. 폭력의 명분은 문동은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이다. 든든한 부모를 등에 업은 가해자들은 문동은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명분 삼아 그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다. 문동은은 한겨울 시린 강물을 바라봤고, 건물 옥상에도 올라봤다. 그가 벼랑 끝에서 마주한 건 다름 아닌 ‘꿈’이었다. 문동은은 순응과 포기의 경계에서 박연진이 되기로 했다. 저들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겠다 다짐한 것이다. “너희들은 재미 삼아 돌을 던졌을 뿐이고, 그래, 맞은 난 죽었다 칠게. 이제 너희도 당해봐. 어디선가 뜬금없이 날아든 돌에 맞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영혼이 부서지는 게 어떤 것인지.”
김 작가는 캐스팅 당시 “박연진의 악행과 악의에는 어떤 이유도, 미화도 없을 것”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그가 강조한 것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행위에는 조금의 이해 지점도, 연민도 없다. 그렇기에 문동은이 결심한 복수도 뚜렷한 공감대와 진정성을 형성한다.
김 작가는 제작발표회에서 “사적 복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를 판단 가능한 성인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청소년 관람 불가로 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악랄한 학교폭력의 실체에 많은 이들은 문동은의 복수를 소망하게 된다.
문동은은 박연진 무리를 추락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일한다. 분식집, 목욕탕, 방직공장 등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대입 검정고시와 수능에 응시한 끝에 교육대학교에 합격했고, 대학생이 돼 주여정(이도현 분)을 만나 바둑을 배우면서 복수 계획에 살을 붙여간다. 마침내 박연진(임지연 분)의 외동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담임으로 부임하게 된 문동은. 그는 박연진을 마주해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나의 체육관에 온 걸 환영해, 연진아.” 체육관은 과거 문동은이 폭행당하던 장소다. 문동은이 담임을 맡게 된 1학년 2반 교실이 복수가 펼쳐질 ‘체육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사적 복수는 보호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문동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과 협력해 남편을 죽이려는 가정폭력 피해자, 강현남(염혜란 분)에게 경고했을 것이다. “이모님은 딸을 잃을 거다. 찌개를 끓이는 그런 저녁은 오지 않을 거다. 우리가 공모한 건, 그런 것”이라고.
문동은이 수시로 긁적이는 화상 흉터처럼 과거 그가 당했던 폭력은 복수 이후에도 봉합되지 않는다. 문동은은 카메라 플래시를 보고 학교폭력 증거 사진을 남긴 날을 떠올리고, 고기를 굽는 회식 자리에서 몸에 화상을 입던 과거를 회상한다.
“용서는 없어. 그래서 그 어떤 영광도 없겠지만”이라는 문동은의 대사는 피해자가 잃어버린 존엄성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영광을 얻지 못하더라도 복수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출한다. 문동은에게 ‘꿈’은 과거를 계속해서 일깨우며, 일상과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고, 지독한 현실감을 준다. ‘더 글로리’, 영광이라는 뜻의 제목 역시 이 같은 의미를 반어로 담아내고 있다.
‘더 글로리’에서는 송혜교의 변신이 돋보인다.
작품마다 아름다운 외모, 돋보이는 매력과 뛰어난 능력, 남주인공들과의 달콤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던 ‘멜로 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미건조한 얼굴이 낯설다. 멜로에서 다양한 감정선을 연기하며 알록달록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더 글로리’에서는 정적인 흑백을 묘사한다. 송혜교는 차갑게 일렁이는 분노와 경멸을 지닌 문동은으로 분해 극을 차분히 이끈다. 특히 박연진의 이름을 부르며 속마음을 전하는 애틋한 어조의 내레이션은 차가운 표정과 대비되며 서늘함을 더한다.
송혜교의 호연, 점차 몰입감을 더해가는 극본, 온기 없는 장면들을 담아낸 섬세한 연출, 배우들의 시너지까지 더해진 ‘더 글로리’지만, 유독 긴장감을 해치는 요소가 있다. 로맨스다. 후반부로 갈수록 무게가 실리는 로맨스는 중심 이야기가 되는 ‘복수’와 어울리지 못하며 겉돈다.
적어도 파트1에서 주여정은 서사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복수에도 영 쓸모가 없다. 주여정은 연쇄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은 후 마음 한구석에 증오심을 품은 인물이다. 그렇기에 문동은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을 투영하며 동질감을 형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가 문동은의 ‘칼춤 추는 망나니’를 자처하게 됐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김 작가도 자신과 함께 항상 언급되는 ‘로맨스’를 의식했다. 제작발표회에서는 “계속 똑같은 복제를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며 “초고를 보고 감독님이 ‘로코 멜로’냐고 하시더라. 많이 (멜로로) 갔다가 정신 차렸다”고 밝힌 바 있다. 냉담하고 치밀해야 할 복수극에 자꾸만 러브 라인을 섞으려고 하니, 몰입도도 떨어진다.
후반부에서는 언뜻 ‘막장 드라마’도 떠올리게 된다. 박연진과 하도영(정성일 분)의 결혼 후 태어난 아이가 전재준(박성훈 분)의 친자라는 사실이 문동은의 추적 끝에 밝혀진다. 물론 이는 문동은이 박연진을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되지만, 수많은 막장을 목격한 시청자들에게 ‘친자’라는 키워드는 이미 식상하다.
결국 문동은의 복수는 갈수록 힘이 빠진다. 파트2에서 펼쳐질 본격적인 복수를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그 호흡이 너무 길다. 멜로, 치정 요소 등으로 문동은이 주는 위협감도 줄어든다는 아쉬움이 있다. ‘더 글로리’는 총 16부작으로, 지난달 30일 파트1(1~8회)을 먼저 공개했다. 상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집을 무너뜨리는 것은 바둑의 공격법이다. 파트1에서는 문동은이 박연진을 비롯한 가해자들, 그 주변인들과의 관계와 일상을 관찰하고 이들의 욕망을 파악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문동은은 이들의 허점을 간파하고, 몰락을 부를 요소를 곳곳에 심어놨다. ‘더 글로리’가 바둑을 주요 매개로 활용하는 만큼, 파트2에서는 문동은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소 뜸을 들였다는 점에서, 복수의 성공 여부를 단언할 수는 없다.
‘더 글로리’ 파트2(9~16회)는 3월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