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캐스터 박연진(임지연 역)은 원고 쓰는 능력이 없어 후배에게 월급을 주고 대필을 맡긴다. 그러면서 원고가 마음에 드는 날이면 해외여행까지 보내주는 통 큰 보상으로 후배를 쥐락펴락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며 인기를 끄고 있는 ‘더 글로리’에서 돈으로 후배를 마음껏 부리는 ‘오피스 빌런(Office Villan·극단적 문제 직원)’ 연진의 이야기가 나온다. 비단 드라마 속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후배를 괴롭히는 갑질 직원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드라마 속 악마 상사의 얘기는 현실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이들은 공공기관과 일반 기업 등 전반에서 발견된다.
8일 KBS 보도에 따르면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서 일하는 A 씨는 상급기관의 과도한 업무 지시를 받아 고통받은 사연을 공개했다. 2021년 8월 감사팀장이던 A 씨는 통일부에서 갑자기 연락받았다.
최근 3년 치 업무 내용, 또 감사팀 운영 계획과 함께 통일부 감사에 어떻게 조치할지 보고하란 지시였다. 시한은 바로 다음 날로 300쪽이 넘는 자료를 하루 만에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A 씨는 당시 ‘업무 보고’를 두고 통일부 국장 출신인 재단의 한 본부장과 갈등을 빚던 중이었다고 한다. A 씨는 그 본부장이 통일부 인맥을 이용해 무리한 지시를 시킨 것으로 의심했다. 수차례 자료 제출을 요구한 통일부 간부는 본부장의 전 부하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사에 착수한 고용노동부는 A 씨의 의심을 사실로 판단했다. 해당 본부장이 재단을 감독하는 통일부를 이용해 부당한 보고를 강요했다고 결정하고 직장 내 괴롭힘 과태료인 500만 원을 부과했다.
시중은행 한 곳에선 간부 직원이 부하 직원을 상대로 현금 갈취, 폭행, 협박 등 도를 넘은 갑질을 일삼았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직장인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한 여성이 은행 직원인 자신의 남편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글을 작성한 아내 B 씨는 내기 골프로 돈을 잃고 실적 미달엔 벌금, 직접 만든 김밥 요구 등 남편이 직장 상사에게 부당한 갑질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직장 내 괴롭힘은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뿌리 깊이 박혀있다. 이는 기업의 생산성과도 직결된다.
직장인 10명 중 3명(28.0%)이 지난 1년 동안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고, 직장 내 괴롭힘 경험자 10명 중 4명(44.6%)이 그 정도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최근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 경험·대응’에 관해 진행한 설문조사의 결과다.
평균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근로자의 22.1%는 회사를 그만뒀는데,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는 절반(47.4%) 가까이 퇴사해 대기업(11.3%)의 4배가 넘었다. 비정규직(34.5%)·20대(32.0%)·여성(30.6%)의 경우 정규직(13.4%), 50대(15.9%), 남성(15.4%)보다 크게 높았다. 비정규직, 5인 미만, 20대, 여성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면 신고보다는 퇴사를 선택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5인 미만 사업장은 가해자가 사용자나 가족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근로기준법 시행령을 개정해 강화된 법을 5인 미만 사업장에 최우선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괴롭힘 경험자 중 7.1%는 ‘자해’ 등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규모에선 5인 미만 기업(15.8%)이 대기업(3.2%)보다 월등히 많았고, 나이별로도 20대(14.0%), 50대(2.9%) 등 어릴수록 높았다. 또 비정규직(10.3%)이 정규직(4.9%)보다 2~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의료적 진료·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본 결과 직장 내 괴롭힘 경험자 10명 중 4명(41.1%)은 진료나 상담이 필요할 정도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 뒤로 ‘진료나 상담이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다’라는 응답이 37.5%, ‘진료나 상담을 받았다’는 응답이 3.6%로 이어졌다. 이를 전체로 환산하면 10명 중 1명은 ‘진료나 상담이 필요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직장 내 괴롭힘이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이를 금지하는 법안이 마련됐음에도 매년 급증하는 추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일인 2019년 7월 16일부터 지난해 8월 말까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총 2만424건으로 집계됐다.
연도별로 보면 시행 첫해(7월 16일 이후) 2130건이었던 신고 건수는 2020년 5823건, 2021년 7774건, 올해 8월 말 4697건으로 상승세가 뚜렷했다. 지난 3년간 검찰 송치 건은 344건, 이 가운데 검찰의 실제 기소가 이뤄진 경우는 133건이었다. 신고 취하는 7924건, ‘법 위반 없음’ 결정이 난 사례는 5498건이었다. 특히 검찰 송치는 2019년 24건에서 2020년 70건, 2021년 148건, 올해 8월 말 102건으로 증가세가 가팔랐다. 유형별(중복신고 가능)로는 폭언이 8841건으로 가장 많았고, 부당 인사(3674건), 따돌림·험담(2867건)이 뒤를 이었다. 차별(823건), 업무 미부여(698건), 감시(691건), 폭행(625건), 강요(350건), 사적 용무지시(231건) 등도 있었다.
사업장 규모별로 보면 50인 미만 사업장이 총 1만1608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어 300인 이상 대기업(3186건), 100∼299인(2700건), 50∼99인(2304건) 순이었다.
전용기 의원은 “매년 신고 건수와 검찰 송치 건수가 나란히 증가하는 것은 문제”라며 “고용부가 나서서 신고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제도가 완전히 안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는 가장 중요한 건 사업주 등 최고 경영자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
고용부가 제공하는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을 보면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직장 내 괴롭힘 근절 메시지를 선언하는 것이 효과적인 예방조치의 첫걸음이다.
경영진의 의지를 보여주는 정책 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의 선포를 검토해볼 수 있다. 정책선언문 등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경영진의 의지를 표현할 때에는 ‘반(反)괴롭힘 정책’ 또는 ‘존중 일터 정책’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전문가들도 “오피스 빌런은 타인의 고통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며 “회사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법적으로 적극 대처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법무법인 율촌은 지난해 10월 7일 ‘오피스 빌런 알고 대응하기’ 온라인 세미나를 열고 법적·심리적 대처법을 소개했다. 이수정·조상욱 율촌 변호사와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가 참석했다. 사회적 관심을 대변하듯 세미나는 2000여 명이 신청했다.
김 교수는 “오피스 빌런은 자신의 이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남을 배려하는 착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무실에서 같은 잘못을 해도 착한 사람을 처벌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수록 오피스 빌런이 의기양양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착한 사람 편에 서야 한다”고 했다.
조상욱 변호사도 “(직장 괴롭힘 등이 발생했을 때) 회사가 피해자 편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강력하게 대처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특히 회사와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피해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피해자가 고통이 극심하다 보니 노동위원회 같은 곳에 출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직접 가서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피해자의 출석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했다. 이어 “회사도 고도의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피해를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