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향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다시 늘고 있습니다. 접근성이 좋고 항공권 가격 부담이 적기 때문인데요. 엔저 현상까지 겹치면서 ‘제주도 갈 돈이면 일본 간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죠.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바로 쇼핑이죠. 동전 파스부터 미키마우스 주걱, 곤약 젤리까지 ‘꼭 사야 할 열도 국민템’만 수 백 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사려면 돈을 더 가져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열도의 물가가 심상치 않거든요.
일본 ‘디플레 경제’가 견인해 온 저가 산업이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지난해 5월 회전 초밥 업계 1위 스시로는 1984년 창업 이후 줄곧 한 접시 110엔(약 946원, 세금 포함)이었던 초밥 가격을 올렸습니다. 지점별 최저 가격은 120~150엔(약 1135~1418원) 수준입니다.
미즈토메 고이치 푸드앤드라이프컴퍼니(스시로 운영사) 대표는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와의 인터뷰에서 “원재료의 70%를 수입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엔화 약세는 (스시로에 있어) 혹독한 환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수산자원 부족과 글로벌 물류 침체, 운송 비용 증가도 가격 인상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다품종 박리다매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둔 100엔 숍들도 위기에 빠졌습니다. 점포 수가 3790개에 달하는 다이소는 일본의 대표적인 100엔 숍인데요. 원가 절약을 위해 중국·베트남 등에 생산 공장을 늘려왔던 것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원자재 가격과 국제 유가가 모두 상승하고 운송비 부담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다이소는 고민 끝에 ‘전 제품 100엔’이라는 기존 정체성을 버리고 긴자에 ‘300엔(약 2840원) 숍’을 열었습니다. 기존보다 고가 상품을 취급하는 ‘스탠다드 프로덕트’, ‘쓰리피’ 등 고가형 매장 확대에 나섰습니다. ‘스탠다드 프로덕트’와 ‘쓰리피’는 300엔 상품을 주력으로 합니다. 특히 ‘스탠다드 프로덕트’에는 최대 1000엔(약 9462원)에 달하는 상품까지 있습니다.
세리아, 캔두, 왓츠 등 다른 100엔 숍들도 다이소와 같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고급화를 비롯해 자동화 및 무인화, 품목 수 줄이기 등의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저가형 매장들의 난관에 봉착한 건 40여 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 때문입니다.
1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일본 도쿄도의 지난해 신선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 4.0% 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1982년 4월 이후 첫 4%대입니다. 지난달 식품 가격은 7.5% 오르고, 전기요금과 도시가스 요금도 올라 에너지 가격은 26% 폭등했는데요. 이들은 인플레이션 가속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전국 물가 선행지표 역할을 하는 도쿄 지역 CPI는 7개월째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의 물가상승률 목표인 2%를 초과했죠.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던 엔화 가치도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최근의 엔저(円低)는 일본 정부가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는 데 따른 현상입니다. 수출 장려를 위한 것인데, 지난해부터 약 1년에 걸쳐 기준금리를 4.25%포인트 인상한 미국과 금리 차가 벌어지며 엔화 가치 폭락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일본은 현재까지 주요국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 중이죠.
다만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일본은행은 임금 상승을 수반하면서 지속 가능한 인플레이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금융완화를 계속할 방침”이라고 밝혀, 당분간 일본의 고물가·엔저 현상은 계속될 전망입니다.
인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든 건 일본으로서는 호재입니다. 그동안 일본은 디플레이션 국면 전환을 위해 아베노믹스를 추진해오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죠.
수십 년간 동결됐던 일본 임금도 오르기 시작한 건 이런 물가 인상 폭을 반영한 겁니다. 일본 임금은 오랜 기간 정체되어 있었는데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결과 일본의 평균 임금은 G7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세계 3위 수준의 경제 대국으로는 뜻밖의 수치입니다.
가파른 물가 인상률을 반영해, 지난해 8월 일본 후생노동성 중앙최저임금심의회가 최저임금을 시간당 930엔에서 961엔으로 3.3%(31엔) 올렸습니다. 최저임금을 시급 기준으로 공표한 2002년 이후 가장 큰 액수입니다. 중앙심의회가 정한 최저임금 수준에 따라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이 다시 심의회를 열어 대개 중앙심의회 기준보다 높은 수준의 최저임금을 정한다는 걸 고려하면 실질적인 임금은 더 높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기업들도 임금 인상에 나섰습니다. 특히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은 올해 직원 연봉을 최대 40%까지 인상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죠. 닛케이에 따르면 패스트리테일링은 3월부터 정규직은 물론 계약직과 아르바이트 시급까지 모두 올릴 방침입니다. 전체 인건비는 약 15%가 올라갈 것으로 보입니다. 신입 직원 기준 월급은 25만5000엔에서 30만 엔으로 오릅니다.
이외에도 연봉 인상률이 일본생명보험은 7%, 산토리 홀딩스는 6% 수준일 것이라고 일본 매체 재팬 타임스가 밝혔습니다. 아사이 그룹, 기린 홀딩스, 삿포로 홀딩스 등도 임금 인상을 고려 중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이에 따라 소비자 물가가 인상할 것이라는 우려도 존재합니다. 유니클로는 지난해 6월 플리스, 히트텍, 캐시미어 등 인기 상품의 가격을 일제히 인상했는데요. 플리스의 경우 유니클로로는 이례적으로 1000엔을 인상했습니다. 당시 유니클로는 “오랫동안 지속돼 온 국제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운송비 등의 인상으로 매장·사업 제반의 운영비가 상승해 6월 27일부터 불가피하게 일부 제품 가격을 인상하게 됐다”고 알렸죠. 수입 물가와 운송비, 물류비 등 부담에 인건비 부담이 더해지는 만큼 유니클로가 제품 소비자 가격을 다시 올릴 것이란 우려도 등장합니다. 저가형 박리다매를 핵심 전략으로 삼던 100엔 숍이 변화를 꾀하는 만큼 저렴한 의류·식품 브랜드 등도 변화에 나설 것이라는 예측도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