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찰로서 국제사회 신뢰 잃어
미국 역시 보조금과 관세 등으로 주변과 마찰
전 세계, 소송 대신 협정 체결에 집중하기 시작
RCEP, IPEF, USMCA 등 다자간 협정 역할 부상
그랬던 질서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 규칙을 근거로 세계경찰 임무를 맡았던 세계무역기구(WTO)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각국은 자국 산업 부흥을 위해 보조금을 조달하고 주변국에 관세를 매기기 시작한 것.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이 같은 문제 중심에 WTO의 안일한 대응이 있다고 꼬집었다. 특히 중국과 관련한 문제에서 확실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권위주의와 사회주의를 기반에 둔 경제 성장을 주도했고 그만큼 시장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국가들과 마찰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WTO가 중국의 차별적 무역 관행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자 곳곳에선 중재자가 분쟁을 키우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응고지 오콘조-이웨엘라 WTO 사무총장은 취임 전부터 친중 성향 인물로 평가된 탓에 WTO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중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WTO는 신뢰를 잃어가는 모양새다.
다자간 기구 중에 WTO가 세계경찰 역할을 했다면 국가적으로는 미국이 그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현 상황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실제로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정권 시절 유럽과 영국, 일본 등에 추가 관세를 매겼고, 조 바이든 현 정권에 와서는 자국 산업에 보조금을 부여하고 있다. 최근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반발한 유럽연합(EU)이 WTO 제소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이 와중에 경찰 역할을 해야 할 WTO와 미국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트럼프 시절 WTO 탈퇴까지 들먹이며 으름장을 놓던 미국은 바이든 정부 들어서도 대립 중이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가 부과했던 주변국에 대한 철강·알루미늄 추가 관세를 대거 철회하면서도 ‘규정 위반’이라는 WTO의 지적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과거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WTO는 미국 조치에 시정 조처를 내릴 권한이 없다”고 지적했다.
WSJ는 이러한 충돌이 세계 무역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는 긴장 관계를 조명하는 좋은 사례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전 세계가 모두 관세를 높여 자급자족 경제로 후퇴했던 1930년대로 돌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 다양한 지역협정 체결이 필수적인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WSJ는 “세계는 미·중 갈등처럼 근본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시스템에 단일 규칙을 적용하기보다 여러 지역협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며 “분쟁 해결 메커니즘이 중요하다는 데는 변함없지만, 앞으로는 많은 분쟁이 소송이 아닌 협상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 모습은 WTO가 있기 전의 과거와 비슷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