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독립영화상(BIFA) 7관왕 등 전 세계 영화제 51관왕에 오르면서 지난해 독립영화계를 휩쓴 영국 영화 ‘애프터썬’이 2월 1일 국내 관객을 만난다. 오래된 홈 비디오 화면에서 시작해 유려한 영상으로 이어지는 화면은 관객이 자연스럽게 주인공 부녀가 지나온 시간을 그려보도록 유도한다.
부녀의 휴가지는 한여름의 튀르키예다. 휴가 시즌의 유럽이 대개 그러하듯 바닷가에 누워 음료를 마시거나 해 질 무렵의 야외 공연을 구경하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
‘애프터썬’은 흘러가는 바로 그 시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해체된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등장하기 손쉬운 갈등이나 방황의 언어는 접어두고, 그저 관객이 부녀의 현재와 지난 시간을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영상과 음악을 배치한다.
잠든 딸 뒤로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슬렁슬렁 몸을 흔드는 아빠의 뒷모습은 그가 여전히 젊은 남자라는 걸 상징한다. 그러면서도 딸에 관한 한 책임감이 있다. “어떤 남자를 만나든, 어떤 파티를 가든… 아빠도 다 해본 거니까 뭐든 얘기해도 괜찮아.”
딸은 그런 말을 듣는 시간이 대개 행복하지만, 가끔은 쓸쓸하다. 휴양지에서 만난 또래들은 이미 이성에 눈을 떠 자신과는 관심사가 조금 다르고, 장단이 곧잘 맞는 것 같던 아빠와도 생각이 다른 순간은 있다. 어떤 밤, 딸은 아빠와 떨어져 홀로 숙소로 돌아온다.
자칫 밋밋하게 흘러갈 수 있는 부녀의 이야기에 힘을 싣는 건 공들인 영상이다. 클로즈업부터 와이드샷까지 자유자재로 구도를 바꿔가며 한 낮의 해변가, 조용한 호텔 방, 로비의 당구장과 수영장에 머무는 부녀의 모습을 다채롭게 담아낸다.
평범한 대화 장면을 포착하는 특별한 순간은 유독 눈에 남는다. 꺼져 있는 TV 브라운관과 곁에 놓인 거울, 양 쪽 표면에 비친 부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에는 한 장면도 허투루 연출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응축돼 있다.
휴양지의 저녁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야기의 시점을 가늠케 한다.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의 주제곡, 온 나라 사람들을 춤추게 했던 스페인 댄스곡 ‘마카레나’(Macarena)의 등장은 ‘애프터 썬’의 배경이 90년대 초중반임을 드러낸다. 이쯤 되면 관객은 부녀의 이야기가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완료형임을 직감한다.
그 휴가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시절의 부녀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이미 장성해 젊은 엄마가 된 딸이 우연히 발견한 캠코더에서 20년 전 아빠와 함께했던 휴가지의 영상을 지긋이 바라보는 장면에 도달했을 때, 관객은 가족에 얽힌 자기만의 맥락으로 많은 감정을 상상하게 된다. 그때 아빠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 딸의 마음은 어떨까.
아빠 역의 폴 메스칼은 이 작품으로 오는 3월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딸 소피 역을 맡은 프랭키 코리오의 ‘진짜 같은 연기’는 영화의 힘 그 자체다. ‘문라이트’의 베리 젠킨스 감독이 제작을 맡고 샬롯 웰스 감독이 연출했다. 샬롯 웰스 감독은 데뷔작으로지난 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됐고, 현재까지 전 세계 영화제 51관왕에 올라 있다.
‘애프터썬’, 2월 1일 개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0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