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가 망치를 ‘느끼는’ 순간은 손잡이가 빠질 때라고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설명했다. 심오한 철학적 함의가 있겠지만, 일상에서 생각해 봐도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공기가 없어져야만 숨을 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인식의 한계, 겸손과 감사의 마음을 일깨우는 죽비다.
현대인의 삶은 크고 작은 물건들과의 다양한 조우로 점철된다. 침대에서 눈을 떠 화장실에 가면 하얀 도기 위에 놓인 비데를 만난다. 튜브에 담긴 치약은 치아 건강은 물론 온갖 자연의 향기까지 전해준다. 양말에서 속옷, 셔츠, 정장과 외투까지 세련된 브랜드들이 저마다 매력을 뽐내며 출근길을 함께 한다. 자동차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학교와 회사에서는 스마트한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공부와 일을 돕는다. 친구라는 오랜 이름을 가진 볼펜을 쥐고 온라인에서 구입한 책에 밑줄을 긋다가 스마트폰 알람에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뛰어가면, 눈과 입에 익숙한 치킨과 맥주 거품이 하루의 피곤을 위로한다. 동네 어귀마다 환하게 불 밝힌 편의점에는 늦은 귀갓길을 위로해줄 맛있는 간식들이 사열 대기 중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바코드와 카드리더기는 일상용품이 되어 있다. 따뜻한 정수기 물에 차를 한잔 마시고, 안마기만 있다면 뭉친 어깨 풀기는 금방이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면서 내일을 준비하다 보면, 보일러가 데운 방안에 스미듯 밤이 내린다. 피부가 좀 땅기지만 눈이 감길 참이니 로션은 하루쯤 건너뛰어도 괜찮다.
에이스침대, 대림바스, 캠시스, 세코닉스, KH바텍, 이랜텍, 뷰센, 일룸, BYC, 예작, 파크랜드, 신성통상, 금강제화, 성우하이텍, 인지컨트롤스, 동양피스톤, 핸즈코퍼레이션, 넥센, 유라코퍼레이션, 에스엘, 에스지, 이디야, 퍼시스, 더존비즈온, 한글과컴퓨터, YES24, 모나미, 맘스터치, 교촌치킨, 하이트진로, 오뚜기, 풀무원, 동원, 동서식품, 빙그레, 샘표, 다날, 린나이, 대림통상, 쿠쿠, 다이소, 바디프랜드, 귀뚜라미, 아이에스동서, 한샘, 한국콜마, 코웨이, 이브자리는 모두 대한민국 중견기업이다. 명단이 길지만, 이름을 불러야 다가와 꽃이 된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눈치를 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앞선 가상의 하루를 장식한 실력파 출연진들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삼성이 만든 최신형이다. 글로벌 브랜드답게 놀라운 성능을 자랑하는데, 당연히 모든 부품을 삼성이 만들지는 않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정도가 아니라, 실제 일등인 수많은 중견기업이 함께 이뤄낸 성취다. 자동차, 반도체, 조선 등 모든 산업 부문이 마찬가지다. 부품만이 아니라 자체 브랜드로 해외 시장을 제패한 중견기업도 많다. 산업부가 선정하는 세계일류상품의 3분의 1이 중견기업 제품이다. 다시 이름을 불러본다. 3D 반도체 검사장비 전문 고영테크놀러지,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PLP 기술기업 네패스, 3D 낸드 플래시 생산용 포토레지스트 분야 동진쎄미켐, 건설공학 분야 소프트웨어 글로벌 리더 마이다스아이티, 치과 영상 진단장비의 바텍, 절삭공구 엔드밀 전문 와이지-원, WiFi-Phone Docking System 창시자 인켈, 시공간 분할 증착기술 개발 기업 주성엔지니어링, IC칩 운영체제 분야 절대강자 코나아이, 폴리페닐렌 설파이드 섬유전문 휴비스, 헬스케어 전문기업으로 도약중인 바디프렌드, 용접재료 제조분야 전문 아바코, 대면적 그래핀 양산 핵심기술 개발 계양전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모두 세계 1위 기업 혹은 세계 최초 기술개발 기업들이다. 극히 일부만 헤아렸는데도, 젊은이들 표현으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의 신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의 66%가 지난해 복합위기에도 불구하고 연초 계획한 경영목표를 달성했다고 답했다. 성장의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다시금 도약하기 위해 꾸준히 도전하고 정진하는 기업이 바로 중견기업이다.
첫 번째 칼럼에서 밝힌 것처럼 공무원으로 30년을 지냈다. 숫자로 빼곡한 정책 보고서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얼마나 제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지 항상 두려웠다.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바빴던 것도 사실이지만 관성에 따른 적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리고 이제 중견기업들을 만났다. 손에 쥔 망치를 마침내 자세히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