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제일 싸다!”
명품 브랜드들이 계속 가격을 인상하면서 소비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왕 살 거, 가격이 오르기 전에 사야 이득이라는 건데요. 루이비통이 6월 1일부로 일부 제품의 가격을 올리면서 다시 한번 이 말을 되새기게 됐습니다.
‘김희애 백’으로 인기를 끈 ‘카퓌진 MM’은 이번 인상으로 기존 984만 원에서 1055만 원이 되며 하룻밤 사이 70만 원 넘게 가격이 뛰었습니다. ‘카퓌신 미니 블랙’ 제품은 812만 원에서 878만 원으로, ‘카퓌신 BB 블랙’ 제품은 863만 원에서 890만 원으로 올랐습니다. ‘쁘띠뜨 말’은 725만 원에서 774만 원으로, ‘온마이 사이드 GM 백’은 646만 원에서 677만 원으로, ‘다이앤 백’은 336만 원에서 355만 원으로 인상됐죠.
이번 인상은 예상된 것이었다는 평이 많습니다. 샤넬이 먼저 가격 인상 주자로 나서면서 루이비통의 6월 가격 인상 역시 기정사실로 여겨져 왔죠.
1000만 원대 소형차가 등장한 상황에서 ‘명품 가방이 차보다 비싸다’는 말은 이미 진부한데요. 명품업계의 가격 인상 행보는 ‘오늘이 제일 싸다’, ‘빨리 사야 재테크’라는 말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명품 브랜드들이 줄인상을 단행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이냐는 거죠. 명품업계의 가격 인상 현황과 더불어 가격을 계속해서 올릴 수 있는 이유, 그 뒤에 숨은 전략을 살펴봤습니다.
3대 명품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에루샤’는 지난해 국내에서 4조 원에 달하는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4월 에르메스코리아·루이비통코리아·샤넬코리아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브랜드의 지난해 매출 합계는 3조9324억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전년(3조2192억 원) 대비 22% 증가한 수치죠.
루이비통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한 1조6923억 원, 영업이익은 무려 38% 증가한 4177억 원으로 나타났는데요. 당기순이익도 69% 성장한 3380억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에르메스코리아는 지난해 전년 동기 대비 23% 성장한 6501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23% 증가한 2105억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당기순이익은 23% 늘어 1538억 원으로 나타났죠. 샤넬코리아도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한 1조5900억 원, 영업이익은 66% 성장한 4129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당기순이익은 3115억 원으로 74% 증가한 수치입니다.
이들 브랜드의 실적 향상 배경으로는 가격 인상이 꼽힙니다. 지난해 샤넬은 국내에서 4차례, 루이비통은 2차례 가격을 인상했습니다. 매년 1월 가격을 올리는 에르메스는 지난해 가격을 평균 4% 올렸습니다. 에르메스는 그간 전통적으로 1.5~2% 수준의 가격 인상 폭을 보였는데, 서너 배가량 폭을 넓힌 겁니다.
올해도 다를 바 없습니다. 엔데믹으로 외부 활동이 늘면서 올해 3월 의류·신발 물가는 1년 전 동월 대비 6.1% 뛰었는데요. 이는 2011년 11월 6.3%를 기록한 이후 11년 만의 최고치입니다. 두 달째 6% 상승률을 이어가고 있는데, 전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약 2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특히 명품 브랜드들은 줄인상에 나섰습니다. 샤넬은 2월과 5월 벌써 두 번 가격 인상을 단행했고, 에르메스는 올해 1월 일부 제품의 가격을 5~10% 올렸습니다. 또 다른 명품 브랜드 보테가베네타도 지난달 6개월 만에 가격을 인상했죠.
명품 브랜드들이 가격을 줄줄이 인상하는 건 고물가로 인한 원자재 가격 인상과 고환율 여파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격을 올려도 수요가 꾸준하다는 사실이 명품업계의 인상 결정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사는 소비자들이 있기에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거죠. 이해니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명품 브랜드가 가격을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사 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며 “고소득자의 소득은 항상 일정하거나 상승하기 때문에 명품 소비 수요는 여전히 탄탄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실로 명품 시장 규모는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경영 컨설팅기업인 베인앤컴퍼니가 이탈리아 명품협회 알타감마와 공동으로 진행한 ‘글로벌 럭셔리 시장 리포트’에 따르면 올해 명품 시장 규모는 3600억~3800억 유로(한화 약 508조~536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한국은 글로벌 명품 시장의 명실상부 ‘큰손’으로도 떠올랐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가 올해 초 발간한 명품 소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인당 명품 소비가 가장 많은 국가입니다.
한국인의 지난해 명품 소비는 전년 대비 24% 증가한 168억 달러(한화 약 22조 원)인데요. 이를 1인 기준으로 환산하면 325달러, 우리 돈으로 약 43만 원인데요. 이는 미국(280달러)은 물론 중국(55달러)보다 훨씬 높은 최상위권 수준이죠.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피가로는 이를 인용해 “유럽 명품 업계가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일본 도쿄에 이어 한국 서울에 주목하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많은 브랜드는 한국 가수, 배우들을 홍보대사(앰배서더)로 발탁하고 있기도 합니다. 샤넬은 빅뱅 지드래곤과 블랙핑크 제니를, 생로랑은 블랙핑크 로제를, 루이비통은 송중기와 방탄소년단(BTS) 제이홉, 뉴진스 혜인을, 구찌는 아이유를, 펜디는 송혜교를 앰배서더로 내세웠죠. 성수동, 한남동, 청담동 등 국내 ‘핫플레이스’에서는 각종 브랜드의 팝업스토어와 플래그십 스토어가 열립니다.
또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회장은 올해 3월 2박3일 일정으로 방한해 국내 백화점, 면세점의 매장을 살펴보고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정유경 신세계 총괄 사장 등 주요 경영진들을 만나 투자 확대, 신규 매장 확장 등 현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기에 올해 4월 루이비통은 서울 한강 잠수교에서 ‘2023 프리폴 컬렉션’을 진행했고, 구찌도 5월 경복궁 근정전 일대에서 ‘2024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를 열었습니다. 최근 한국 내 명품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한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시장에 공을 들이는 겁니다.
가격 인상은 하나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일반 제품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격을 책정하며 최고 품질의 상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브랜드 가치까지 강화하는 건데요. 명품 중에서도 가격대가 높은 편에 속하는 에르메스는 가죽을 프랑스에서만 생산하고 연간 가죽제품 생산량 증가율을 6~7%로 고정하며 공급을 통제합니다. 그 결과 대표 인기 제품인 버킨백과 켈리백은 “돈이 있어도 못 산다”는 하소연이 나올 만큼 희소성을 띠게 됐고, 에르메스는 고급화와 타 브랜드들과의 차별화에도 성공했다는 평을 듣죠.
통상 제품 가격 인상은 수요를 꺾는 요인이지만, 명품업계에서 이 공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일반 소비재가 아니기에 가격 인상에 따른 수요 감소 폭도 적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백화점 영업시간 전부터 줄을 서는 것은 물론 밤을 꼴딱 새워서 줄 서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러나 엔데믹이 찾아오고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명품 소비는 해외여행, 오프라인 소비 등으로 분산되고 있는데요. 그렇더라도 명품 수요가 극단적으로 감소하는 건 사실상 어렵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은 4개 분기에 걸쳐 감소했으나, 명품산업은 2개 분기 매출이 감소했다가 성장세로 다시 돌아선 바 있죠.
기업들은 굳건한 수요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앞으로도 ‘배짱 장사’에 가까운 전략을 고수할 듯합니다. 가격이 오르는데도 과시욕이나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 소비하는 ‘베블런 효과’를 노린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한 가지 사실을 인지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격 인상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인상 폭은 점점 커지면서 같은 명품이더라도 한국 평균 소비자가격이 프랑스 등 유럽에 비해 20%가량 높은 상황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국내에서 발생한 수익 대부분은 해외 본사로 향합니다. 국내 기부금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는데요. 루이비통코리아, 샤넬코리아, 크리스챤디올꾸뛰르코리아, 에르메스코리아, 프라다코리아 등 5개 해외 명품 브랜드가 제출한 지난해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브랜드의 기부금 총액은 15억9322만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샤넬(10억1584만 원)과 에르메스(5억6117만 원)가 대부분 기부한 것으로, 호실적을 기록한 루이비통과 구찌는 국내에서 기부금을 단 한 푼도 안 냈죠. 루이비통, 불가리 등을 소유한 LVMH는 중국 적십자에 230만 달러(한화 약 28억 원), 구찌, 보테가베네타 등을 보유한 케링 그룹은 110만 달러(13억 원)를 기부한 바 있습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한국이 호갱(호구+고객)’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잇단 가격 인상에도 ‘오픈런’을 뛰는 한국 소비자들이 글로벌 명품업계의 먹잇감이 됐다는 겁니다. 르피가로는 “한국은 가계 부채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편인데, 여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성수동 디올 팝업 앞에는 젊은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며 “치솟는 부동산 가격과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 가정 꾸리기를 주저하는 젊은 층이 결혼할 때까지 부모와 살면서 월급을 당장의 즐거움을 좇는 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짚기도 했죠.
물론 명품 소비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은 시장 경제 논리에 따라 결정되고, 소비 역시 자유롭죠. 그러나 업계의 배짱 장사를 인지할 필요는 있습니다. 가격 인상에 그치지 않고 인상 전 주문을 강제로 취소한다거나, 추가금을 요구하는 일종의 ‘갑질 행위’까지 눈감아준다면, ‘글로벌 호갱’ 지적을 듣는 것도 멀지 않은 일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