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부총리는 18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라면값 인상의 적정성 문제가 지적되자 “지난해 9~10월에 (기업들이 라면값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면서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국제 밀 가격이 최근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여건을 소비자가격에도 반영해달라는 취지로 읽힙니다.
추 부총리는 정부가 원가 조사와 가격 통제를 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소비자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견제하고 가격 조사도 해서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라면 가격이 급등한 건 사실입니다. 라면 업계는 지난해 하반기 출고가를 평균 10%가량 올렸습니다. 농심은 지난해 9월 제품 출고가를 평균 11.3%, 오뚜기와 팔도는 10월 각각 11.0%, 9.8%, 삼양식품도 11월 라면 가격을 평균 9.7% 올렸죠.
라면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24.04로 1년 전보다 13.1% 올랐는데요.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2월(14.3%) 이후 14년 3개월 만에 가장 큰 상승 폭입니다.
다만 라면 업계는 추 부총리의 이번 발언에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공개적으로 인하 요구를 받은 건데, 정부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는 실정이죠. 더군다나 정부의 압박이 소비자들의 반발과 외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고심에 빠진 모양샙니다.
통상 한 번 올린 유통가격은 다시 내리기 어렵지만,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농심은 국제 금융위기로 물가가 치솟았던 2008년 대표 제품인 신라면 가격을 15.4% 대폭 올렸다가 2년 만인 2010년 2.7% 낮춘 바 있습니다. 당시 밀가루 등 원부자재값이 1년 전보다 10% 이상 하락한 데 따른 건데요. 이때 삼양식품도 원재료 값 안정에 따라 삼양라면을 포함한 라면 제품 5종 가격을 2.9~6.7% 인하했죠.
그러나 이후로는 한 번도 가격을 인하한 적 없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코로나19 영향으로 밀가루, 팜유 등 원부자재 가격이 상승하며 라면값은 최근 2년 사이에만 20% 넘게 올랐죠. 라면의 전년 동월 대비 물가 상승률도 지난해 9월 3.5%에서 10월 11.7%로 껑충 뛰었고, 지난달까지 8개월 연속 10%대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라면 3사가 2021년 가격을 올린 후 1년가량 보류해온 가격 인상을 지난해 9월과 11월 잇달아 단행한 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라면 가격 인상은 기업들의 올해 1분기 실적에도 개선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농심은 올해 1분기 매출 8603억 원을 기록했는데요. 이는 전년 동기(7363억 원)보다 16.9% 증가한 수치입니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343억 원에서 637억 원으로 무려 85.8% 급증했죠. 오뚜기도 전년 동기(7424억 원)보다 15.4% 증가한 8567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영업이익도 전년 동기(590억 원) 대비 10.7% 증가한 653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삼양식품은 올해 1분기 매출 2455억 원으로 전년 동기(2022억 원) 대비 21.5%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239억 원으로 전년 동기(245억 원)보다 소폭(2.6%) 감소했습니다.
이 같은 호실적은 라면값 인하 요구에도 힘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업계는 난색을 보이고 있죠. 원가 부담이 여전해 당장 가격 인하를 결정하긴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요. 우선 국제 밀 가격 하락이 즉각 제품 원재료 가격 인하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국제 밀 가격은 선물 가격이기에, 거래 시세 등락이 식품 기업의 구매 시점에 반영되기까진 통상 최소 3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여기에 환율의 영향도 있죠. 또 국내 라면 제조사들은 해외에서 직접 밀을 수입해서 밀가루를 만드는 게 아니라 국내 제분업체에서 밀가루를 구입하는데, 이 밀가루 가격이 떨어지지 않아 원가에도 영향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업계는 국제 밀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평년 대비 여전히 높은 수준이고 이외에 다른 원부자재값과 인건비, 물류비 등 기타 제반 비용은 오름세를 보이고 있어 원가 부담이 여전하다고 토로하고 있죠.
추 부총리의 이번 가격 인하 발언으로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기업 탐욕에 의한 물가 상승)’ 논쟁에 불이 붙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은 미국 물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지난해 여름 민주당 일각에서 ‘대기업의 탐욕이 인플레이션을 조장한다’고 비판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로까지 번져 한창 갑론을박을 빚고 있는 주제기도 하죠.
영국 가디언은 3월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영향으로 수익이 악화한 기업들이 과도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며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350개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2019년 상반기 5.7%에서 2022년 상반기 10.7%로 상승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그리드플레이션은 주로 식품 업체들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품 물가 상승률은 세계적으로 유독 높고, 소비자들이 몸소 체감하는 지점이기 때문이죠. 유럽연합(EU)의 4월 식품 물가는 1년 전보다 무려 16.6%나 뛰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무려 19%로 45년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죠. 제레미 헌트 영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달 “식품 가격이 여전히 너무 높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면 가격이 20% 급등하면서 불매 운동 주장까지 나왔는데요. 푸리오 트루치 소비자권익보호협회 대표는 “높은 가격이 (기업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유지되고 있다. 소비가 크게 줄어야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강조했죠.
프랑스 투자은행 소시에테제네랄의 앨버트 에드워즈 글로벌 전략가는 최근 그리드플레이션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지난 한 해 동안 영국과 미국,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로 상승했다”며 “위기를 틈타 기업들이 마진을 더 높였는데, 놀라운 것은 원자재 값이 하락했음에도 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원자재 값 상승을 기업들이 가격 인상과 이윤 확대의 ‘변명’으로 삼았다고 지적하기도 했죠. 기업의 과도한 이윤 추구가 인플레이션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유럽에서는 식품 가격 상승을 제한하는 가격 통제 정책을 시행하거나 비용을 낮추기 위해 식료품점과 협정을 추진하는 등 가격 규제 움직임이 일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그리드플레이션 자체를 부인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앤드루 베일리 영국 중앙은행 총재는 “식품 공급업체나 소매업체가 폭리를 취했다는 증거가 없다”면서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을 일축했습니다. 미국 경제학자 제이슨 퍼먼은 “기업의 탐욕이 인플레이션 상승의 주요인은 아니”라며 “‘가격 부풀리기’에 초점을 맞춘 건 인플레이션 원인과 해결책 탐구에 대한 방해일 뿐”이라고 지적했죠. 미시간대 경제학자 저스틴 울퍼스도 퍼먼을 인용해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탐욕 탓으로 돌리는 건 마치 비행기 추락 원인을 중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고 밝혔습니다.
라면은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만큼, 서민 물가 인상의 선봉으로 인식되는 모양새입니다. 일부 라면 업체는 정부로부터 공식 요청을 받은 건 아니지만, 물가 부담을 낮추기 위한 방안을 ‘가격 인하’까지 포함해 다각도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죠.
다만 유럽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인위적인 가격 통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헝가리는 지난해 초 가격 상한제를 시행했다가 역효과를 본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일정 품목에 가격 상한제가 도입되자 상인들은 여기서 발생한 손해를 다른 제품 가격을 올리면서 상쇄하려 들었는데요. 역마진을 우려해 아예 유통을 포기해버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식료품 가격이 50% 가까이 오르는 등 역풍을 제대로 맞았죠.
이에 죄르지 머톨치 헝가리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해 12월 의회 청문회에서 “가격 상한과 유사한 모든 아이디어는 이미 사회주의 시대 때 효과가 없다는 게 입증됐다”며 정책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가격에 대한 인위적인 개입은 단기적으론 소비자 부담을 일부 줄일 순 있겠지만, 장기 인플레이션엔 결코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도 최근 보고서에서 가격 통제는 시장 왜곡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IMF는 물가 상승 흐름을 제한하는 조치는 비용이 많이 들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게 돼 ‘차선책’이 돼야 한다면서, 취약 계층에 대한 선별 지원을 우선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추 부총재의 이번 발언이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는 취지의 비판도 나오는데요. 무리한 가격 억제가 시장 활력을 떨어뜨리고 왜곡을 부른다는 사실이 해외에서 이미 입증된 만큼, 특정 품목에 대한 압박보다는 시장 경제와 기업 경쟁력 강화 촉진이 적절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