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없어요”
정부가 마약 중독자 치료보호기관으로 지정한 병원에 전화를 걸어 마약 중독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자 맥빠지는 말이 들려왔다. 올해 기준 24곳의 정부 지정 의료기관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약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어도 치료해줄 의사가 없는 현실, 마약 신흥국으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한국의 자화상이다.
마약 중독자 수가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 22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1만2387명이 마약 사범으로 검거됐다. 2018년 8107명에서 5년 새 50%가량 증가한 것이다. 마약 사범이 가장 많은 연령대는 20대로 같은 기간 1392명에서 4203명으로 3배 이상 늘었다. 2018년 40대, 30대, 50대에 이어 4위를 차지했던 20대 마약 사범 수는 작년 1위로 올라섰다. 10대는 104명에서 209명으로 두 배 뛰었다. 마약대책협의회는 ‘물밑’ 마약 인구 규모를 체포된 사람의 약 30배로 추정하고 있다.
청소년의 마약 경험은 섬뜩할 정도다. 여성가족부는 전국 초(4∼6학년)·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청소년 1만71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청소년 매체이용 유해환경 실태조사’ 결과, 청소년 10명 중 1명이 펜타닐 패치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2일 발표했다. 극소량만으로도 강력한 환각효과 및 이상행동을 일으켜 '좀비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이 10대까지 빠른 속도로 파고든 것이다.
중독 우려는 더 크다. 최근 5년간 재범률은 52%까지 치솟았다. 2명 중 1명이 마약에 다시 손을 대고 있는 셈이다. 특히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 실험 결과, 중독성은 성인보다 청소년에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속을 넘어 치료·재활·사회복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다. 마약 중독을 다룰 전문의가 턱없이 부족하고, 병동 등 필수 시설을 갖춘 병원도 전무한 실정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 지정병원의 정신과 전문의 수는 135명 정도다. 의료법상 정신과 전문의가 세부 분야인 노인, 소아, 재활, 중독 등을 모두 다룰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약물 중독의 특성상 전문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약물 중독인지를 감별할 만큼 경험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 전문기관 10곳을 합쳐도 사실상 마약 중독 치료와 재활을 담당할 수 있는 의사는 손에 꼽힌다는 지적이다.
서울시가 마약류 중독자 전담병원으로 지정한 은평병원은 21일 처음으로 마약 중독 치료 전문의 모집 공고를 냈다. 마약류 전문의 ‘텃밭’ 자체가 메마른 데다가, 공공병원의 의사 구인난은 특히 심각해 고민이 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간과의 싸움인 마약 중독 치료가 때를 놓치기 십상이다. 인천참사랑병원 관계자는 “지금 예약하면 진료까지 2~3달은 걸린다”고 말했다.
시설 투자도 갈 길이 멀다. 마약 중독은 치료 중 응급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경련, 호흡곤란, 감염, 공격 행위 등 금단 증세가 나타날 수 있어 병동 분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지정병원 중 병동이 분리된 곳은 경남의 국립부곡병원이 유일하다. 나머지 병원은 일반 병동 환자와 섞여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어 안전 우려가 제기된다.
마약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와 서울시는 처벌·단속부터 치료·재활까지 포괄하는 총력 대응을 강조하고 나섰다. 정부는 4월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추진 계획’을 발표했고, 서울시도 전국 최초로 마약류 중독 치료·재활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마약퇴치운동본부 관계자는 “마약 중독 환자는 진료 자체가 어려워 의사의 경험은 물론 의지가 중요하다”며 “인센티브 제공이 개선방안에 담겼다고 하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