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만 해도 900원대 후반에서 1000원 선을 종종 터치하던 원·엔 환율은 최근엔 800원대에 진입했습니다. 원·엔 환율이 900원대 아래로 떨어진 건 2015년 6월 이후 8년 만입니다.
이에 ‘엔저효과’를 누리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 여행 수요가 크게 증가했는데요. 22일 일본정부관광국(JNTO)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189만8900명으로 1년 전의 12.9배로 늘었습니다. 나라별로 좁혀보면 한국인이 51만570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 뒤는 대만(30만3000명)과 미국(18만3000명)이 이었죠. 비행시간이 짧아 주말을 활용해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시간 부담이 적은 데다가, 최근 엔저 현상으로 여행비 부담이 줄어들어 일본 여행의 매력이 더 커진 겁니다.
엔화를 싼값에 사두었다가 나중에 오르면 되팔려는 엔화 재테크, 이른바 ‘엔테크’에도 수요가 몰렸습니다. 지난달 시중은행 4곳의 엔화 환전 규모는 1년 전보다 5배 급증했고,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 엔화 예금 잔액은 15일 기준 약 8109억7천만 엔으로 지난달 말(6978억6천만 엔)과 비교해 보름 만에 16% 증가했습니다. 지난해 6월 말 잔액(5862억3000만 엔)과 비교하면 38%나 많은 수치입니다. 엔화 예금은 이자가 거의 없고 수수료까지 내야 하지만, 엔화 가치가 올랐을 때 팔아 얻을 수 있는 환차익엔 세금이 붙지 않습니다.
또 일본 증시가 33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강세를 보이자 일본 주식 투자 열풍도 불었는데요. 21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들어 전날까지 국내 투자자들이 예탁결제원을 통해 일본 증시에 투자한 순매수(매수 금액-매도 금액) 규모는 4017만129달러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지난달 순매수액인 3441만7212달러를 벌써 넘어선 건데요. 주가 상승률과 환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일학 개미들을 이끈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개인은 일본 여행, ‘엔테크’에 나서며 엔저를 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일각에서는 역대급 엔저가 우리나라 경제에 가져올 수 있는 ‘악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죠.
우선 엔저가 이어지면 여행수지에 타격이 갑니다. 일본행 여행객이 늘면 여행수지 적자 폭은 더 커지고, 경상수지에도 악영향을 끼치는데요. 올 1분기 여행수지 적자 규모는 32억3500만 달러로 2019년 3분기(32억8000만 달러) 이후 가장 큰 상황입니다.
여기에 엔저 심화는 전통적으로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요소로 받아들여집니다. 실로 2010년대 초 엔화 약세가 심화하면서 국내 수출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 바 있죠.
2013년 당시 아베 정권이 정책을 통해 엔저를 유도하면서 1년 만에 엔화 가치가 20%가량 급락했습니다. 이때 기술력을 갖춘 일본 건설사들은 낮은 원자잿값과 계약금을 내걸면서 국내 기업들을 따돌리고 계약을 따냈습니다. 일본은 카타르의 라판 정유공장 2단계 확장 프로젝트 설계·구매·시공(EPC) 입찰도, 중동지역 최대 발주 공사 중 하나였던 터키 원전 건설 사업(220억 달러 규모)도 가져가면서 해외 건설시장을 공략했죠.
가격 경쟁력에서 선두를 차지하면서 수출도 증가했고, 외화로 벌어들인 금액을 엔화로 환산하면서 순이익을 불렸습니다. 일본 기업의 호실적은 숫자로 나타납니다. SMBC닛코증권이 금융사를 제외한 상장기업 1308곳의 2022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실적을 분석한 결과, 상장사들의 매출액은 이전 회계연도 대비 14.2% 증가한 580조3000억 엔으로 잠정 집계됐습니다. 영업이익도 4.2% 늘어난 39조1000억 엔으로 전망됐습니다.
미쓰이물산, 미쓰비시상사 등은 일본 종합상사 중 처음으로 연간 순이익 1조 엔을 넘기기도 했는데요. 최근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 헤서웨이 회장이 일본 5대 종합상사(미쓰이물산·미쓰비시상사·마루베니·이토추상사·스미토모상사)를 ‘앞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기업’으로 칭하며 지분을 추가로 늘려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일본과 수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엔저가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일본의 수출 경합도는 주요국 사이에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의 제조업 수출 경합도는 69.2인데요. 이는 한국과 미국(68.5), 한국과 독일(60.3), 한국과 중국(56.0) 등 다른 주요국과 수출 경합도를 웃도는 수치죠.
2005년부터 지난해 3분기까지 통계에 따르면, 엔화 가치가 1% 포인트(p) 떨어질 경우 우리나라의 수출가격(-0.41%p)과 물량(-0.20%p)이 줄어들면서 수출금액 증가율(-0.61%p)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로 일본이 대규모 금융완화에 나선 2012년엔 일본 기업들이 역대급 엔저(100엔당 885.11원)로 인한 가격 경쟁력을 손에 쥐면서, 전년 대비 4.4%에 달했던 국내 기업의 수출 증가율이 2년여 만에 2.3%로 줄어들며 거의 반토막 났습니다.
즉, 엔저는 일본 수출 기업엔 가격 경쟁력의 도구가, 우리 기업엔 타격을 주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섭니다. 전 세계 주요국들의 통화 긴축 흐름 속, 일본은행(BOJ)은 이달 16일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0% 정도로 유도하는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지속하기로 했는데요.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안정적으로 달성할 때까지 금융완화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입니다.
다만, 최근 엔저로 인한 국내 기업의 피해는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우리 기업들이 수출 경합도가 높은 산업을 중심으로 기술 경쟁력, 차별화된 품질, M&A, 해외투자 활성화 등을 확보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가격 경쟁력을 상쇄할 만한 요소를 여럿 갖추게 됐다는 평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엔저 현상이 장기화할 경우 아무래도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은 초저금리 정책을 고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요. 수출 부진 속 엔저 현상까지 길어질 경우엔 우리 기업들의 수출 회복에도 적신호가 켜지게 됩니다. 특히 수출 경합도가 높은 자동차, 철강, 기계 등 업종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수출 단가와 채산성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죠.
이에 영향을 최소화할 만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3분기까진 엔저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종료와 일본 은행의 추가 정책 조정 등 가능성을 고려할 때, 9월 이후 엔화가 반등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데요.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저점을 찍은 후로는 완만하게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면서 “8월 정도 저점을 찍고 9월부터 올라간 후 4·4분기에서 내년 초까지 반등하는 흐름을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100엔당 원화 환율은 3분기 중 890엔대에서 바닥을 형성한 이후 반등해 900엔대 초중반에서 등락을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며 “일본은행 통화정책 변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지만 당분간 완화적인 정책 기조는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BOJ 총재가 바뀐 상황이라 정책이 점진적으로 바뀔 조짐이 있기 때문에 (원·엔 환율이) 지금보다 더 내려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7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도 있고,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 폭도 천천히 줄고 있기 때문에 원화가 급격한 강세를 보이기도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엔저는 개인에겐 환호를, 국내 수출 기업엔 우려를 자아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이 ‘통화 완화’를 목표로 돈을 계속 풀겠다는 입장을 강조함에 따라 엔화 약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데요. 일본 경제가 인위적인 초저금리, 엔저 현상에 기댄 채 시장 활성화를 꾀하고 있는 만큼 국내 투자자는 변동성이 존재한단 사실을 유의하고, 기업 입장에선 수출 품목 차별화, 일본보다 우위에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활용 등 위험성에 따른 대비책을 미리 마련해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