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값 내리면 양 줄이는 거 아냐?”…소비자 불신시대 [이슈크래커]

입력 2023-06-29 16:41수정 2023-06-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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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라면. (뉴시스)
라면 업계가 줄줄이 라면 가격을 인하한다고 밝혔습니다. 가격 인하를 통해 물가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입니다.

27일 농심은 다음 달 1일부로 신라면과 새우깡의 출고가를 각각 4.5%, 6.9% 인하한다고 밝혔습니다. 농심이 신라면 가격을 내리는 건 2010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입니다. 새우깡의 경우 이번 가격 인하가 처음이죠.

라면 업계 1위인 농심에 이어 삼양식품도 라면 가격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다음 달 1일부로 삼양라면, 짜짜로니 등 12개 품목을 평균 4.7% 인하합니다. 오뚜기도 다음 달 1일부로 라면류 15개 제품 가격을 평균 5% 인하한다고 밝혔고, 팔도도 일품해물라면, 왕뚜껑봉지면, 남자라면 등 11개 라면 제품에 대해 소비자 가격 기준 평균 5.1% 인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변경된 가격은 7월 1일부터 순차 적용됩니다.

이로써 주요 라면 4사가 모두 가격을 인하하게 됐는데요. 다만 소비자들 반응은 엇갈리고 있습니다. 업체들이 말하는 ‘물가 안정’ 취지는 반갑지만, 정작 일상에서 체감하는 가격 인하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겁니다. 또 일각에서는 가격 인하가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라면 매대의 모습. (뉴시스)
정부 압박에 ‘울며 겨자 먹기’ 인하…‘슈링크플레이션’ 우려도

이번 식품 업계의 가격 인하는 정부의 언급에 ‘백기’를 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농림축산식품부는 최근 밀가루와 라면 등 제품 가격 인하를 강조해왔습니다. 특히 추 부총리는 라면값에 대해 “지난해 9~10월에 (기업들이 라면값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며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는데요. 추 부총리는 정부가 원가 조사와 가격 통제를 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소비자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견제하고 가격 조사도 해서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덧붙였죠.

특히 정부는 ‘담합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식품 업체들에 대한 공정위 조사를 거론하기도 했고, 여기에 소비자 단체도 가세했습니다. 연일 높아지는 압박 수위에 식품 업체들도 결국 가격 조정에 나선 겁니다.

농심 측에 따르면 이번 밀가루 가격 인하로 80억 원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는데, 신라면과 새우깡 가격을 내리면서 소비자에겐 연간 200억 원가량의 혜택이 돌아간다고 합니다. 단순히 계산해보면 농심만 하더라도 연간 120억 원의 부담을 져야 합니다. 농심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600억 원가량이라는 걸 감안하면, 1개 분기 정도의 영업이익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셈이죠. 가격 인하를 결정한 기업 입장에서는 악화할 실적을 상쇄할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제품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나왔습니다. 가격 인하로 인한 손실 보전 차원에서 제품 용량을 줄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입니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영국 경제학자 피파 맘그렌이 ‘줄어들다’(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해 제안한 용어인데요. 소비자의 소비심리를 고려해 가격을 올리는 대신, 크기나 용량을 줄이면서 간접적으로 제품 가격을 올리는 현상을 뜻합니다. 실로 소비자들이 용량이 줄어들거나 품질이 저하됐다는 건 눈치 채지 못하고 가격을 올리는 부분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죠.

미국 소매 데이터 분석업체 84.51°가 발표한 ‘컨슈머 다이제스트 2022년 8월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슈링크플레이션을 체감한 품목은 과자류 51%, 시리얼 37%, 막대사탕 29%, 화장실 휴지 26% 순으로 집계됐습니다.

그런데 응답자의 약 44%가 중량이 줄어도 쿠폰이 있으면 구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43%는 차라리 같은 용량의 다른 브랜드를 구매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나머지 37%는 용량이 줄어들었어도 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죠. 중량을 줄인다고 해서 가격을 올리는 것만큼 소비자가 크게 이탈하지 않는다는 건데요. 업계가 가격 인상 대신 용량을 줄이는 방안을 택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섭니다.

▲제과업계의 과대포장을 꼬집기 위해 질소 충전된 과자 봉지 150여 개를 묶어 ‘과자 뗏목’을 만든 대학생들이 2014년 9월 28일 서울 송파구 잠실한강공원에서 직접 노를 저어 한강을 건너고 있다. (뉴시스)
한국에선 ‘과자 뗏목’, 영국에선 ‘안 취하는 맥주’ 등장

라면 인하 방침에 슈링크플레이션 우려가 나오는 게 새삼스럽진 않습니다. 그간 식품 업계에서 용량을 줄여 가격 인상 폭을 보전한 사례는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죠.

‘질소 과자’ 논란이 일었던 게 대표적입니다. 질소 과자는 빵빵하게 부푼 봉지에 비해 내용물은 손바닥 정도 되는 적은 양의 과자를 일컫는 말인데요. 통상 봉지 과자는 부서지거나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포장지 안에 질소를 주입합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부터 과자 업계는 과자의 양은 줄이고 질소의 양을 늘리면서 부피는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전과 같은 값에 판매했기에 판매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죠. 불황에 살아남는 일종의 생존법이었습니다.

이런 상술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들이 항의 퍼포먼스를 보여줘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2014년 9월 대학생 2명은 국산 과자 봉지 150여 개를 묶어서 뗏목을 만들었습니다. 이 뗏목은 출발한 지 30분 만에 900m 거리의 한강을 횡단하는 데 성공했죠. 127g짜리 봉지 과자 150여 개가 건장한 체격의 성인 두 명을 가뿐히 띄운 겁니다. 봉지가 기체로 빵빵한 덕에(?) 가능한 일이었는데요. 이는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과자 업계의 과대 포장 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기획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드링크플레이션’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20일 데일리메일 등에 따르면 영국 유명 맥주 브랜드들은 소비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ABV)를 낮춰왔다고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포스터(Foster’s)는 올해 초 4%에서 3.7%로, 올드 스페클드 헨(Old Speckled Hen)은 5%에서 4.8%로 알코올 도수를 낮췄습니다. 1698년에 세워져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이름을 알린 셰퍼드 님(Shepherd Neame)도 3월부터 병맥주 스핏파이어(Spitfire)의 알코올 도수를 4.5%에서 4.2%로, 에일 맥주 비숍스핑거(Bishops Finger)는 5.4%에서 5.2%로 낮췄다고 최근에야 밝혔습니다.

이에 현지에서는 8월부터 바뀌는 영국 주세 정책에 대비해 양조 업계가 세금을 덜 내려고 ‘꼼수’를 부린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영국 조세 당국은 같은 양의 술이더라도 알코올 도수를 3단계로 구분해 도수가 높을수록 세금을 많이 물리고 있는데요. 새로운 주세 규정은 알코올 도수별 세금 차등 부과 방침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 세금 부담을 피하고자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낮췄다는 지적입니다.

매체는 영국 셰필드 대학 콜린 앵거스 연구원의 인터뷰를 인용해 “모든 양조장이 알코올을 0.3%만 줄여도 약 2억5000만파운드(한화 약 4100억 원)의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 병이나 한 캔 단위로 보면 큰 금액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맥주 소비량이 워낙 큰 규모라 이를 모두 합친다면 절세 규모가 상당하다는 겁니다.

특히 업체들이 세금을 줄여 원가 부담은 낮춰 놓고, 맥주 가격은 그대로 유지해 정작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없다는 지적인데요. 더군다나 맥주가 들어간 병과 캔의 모양, 크기엔 변화가 없고 양도 같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변화를 감지하긴 더 어렵습니다. 매체도 “드링크플레이션이 슈링크플레이션보다 더 교활하다”며 “소비자들은 같은 돈을 내고 자기도 모르게 몇 달씩이나 약한 도수의 맥주를 마셔온 것”이라고 짚었죠.

올드 스페클드 헨을 만드는 그린 킹은 인플레이션을 거론하며 “원자재 포장비,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는 등 생산 비용이 증가한 데 따른 조치”라고 해명했습니다. 사실상 세금을 포함한 원가를 낮추기 위해 알코올 도수를 낮췄다는 점을 인정한 셈입니다. 반면 셰퍼드 님은 “소비자들이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점점 알코올 함량이 낮은 음료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죠.

▲경제 전반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13개월 만에 낙관적으로 돌아섰다. 한국은행이 28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6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00.7로 5월(98.0)보다 2.7p 올랐다. 4개월 연속 오름세일 뿐 아니라, 이 지수가 100을 웃돈 것은 지난해 5월(102.9) 이후 13개월 만에 처음이다. 사진은 28일 오후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는 모습. (뉴시스)
‘두더지 잡기’ 식 시장 개입, 부작용 발생 가능성 커…서민 경제 전반 살펴야

일단 라면 업계는 가격 인하 압박에 한발 물러서며 일부 품목의 가격을 내리고, 물가 안정을 위해 손실을 부담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언젠간 인하에 따른 손실을 상쇄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가 큽니다. 이에 인력·서비스 축소, 용량을 줄이거나, 더 큰 폭으로 가격이 치솟는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실제로 2008년 이명박 정부는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자, 민생과 밀접한 52개 품목을 관리 대상으로 지정해 특별 관리했다가 역풍을 맞은 바 있습니다. 가격 상승을 억제하겠다는 취지로 라면을 포함한 소주, 두부 등은 480여 개로 구성된 소비자물가지수와는 별도의 물가지수로 취급됐는데요. 이른바 ‘MB물가지수’였죠.

당시 취지 역시 ‘물가 안정’이었지만, 결과는 정부 방침과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52개 품목 중 48개 품목 가격은 오히려 올랐습니다. 이후 3년간 일반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7%를 기록했다면, MB물가지수 품목의 평균 물가 상승률은 19.1%를 기록했죠. 다수의 품목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훨씬 앞지르면서 사실상 물가 안정에 실패했다는 평이 나왔는데요. 당시 정치권에서는 “보여주기식 행정에만 급급했던 결과”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습니다.

정부의 인위적 시장 개입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상황입니다. 여기에 단순히 특정 업계를 콕 집어 가격을 인하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거시경제 대책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죠.

정부가 나서서 ‘물가 안정’을 강조하는 모습은 근본적인 의문을 부르기도 합니다. 자유경제를 강조하고 중시하는 정부의 지향점과 인위적 개입의 맥락이 같냐는 겁니다. 최근 공공요금까지 줄줄이 오르면서 서민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물가 안정세라는 발표도 좀처럼 체감되지 않는 모양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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