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밤사이 수도권을 비롯한 내륙 곳곳엔 120㎜에 달하는 호우가 내렸습니다. 특히 경기도 연천 중면 122㎜, 충남 청양 115.5㎜, 경북 상주 은척면 113㎜, 대전 112.5㎜, 서울 강북구에도 108㎜의 물폭탄이 쏟아졌는데요. 새벽 3시 50분께 목포, 영암, 무안, 신안 등 전남 서해안지역에는 폭풍해일경보가 이례적으로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통상 폭풍해일경보는 태풍이나 지진 등에 의해 발령되는데, 이번에는 달의 인력에 의해 만조 시 수위가 급상승하면서 해안가 저지대 침수와 안전사고가 우려돼 내려진 겁니다. 다행히 이는 한 시간 만에 해제됐죠.
곧 장맛비는 소강상태에 들었습니다. 정체전선에 동반된 저기압이 동해상으로 빠져나간데 따른 것인데요. 문제는 이내 폭염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날 아침 기온은 21~25도였으나, 낮에는 영남을 중심으로 기온이 31도 이상으로 올라 더운 날씨가 이어졌죠. 여기에 습도까지 높아 일부 지역에서는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으로 오르기도 했습니다. 강원과 전남 동부, 경상권에는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폭염주의보가 발효됐습니다.
통상 비가 그치면 비구름대가 빠져나간 자리를 찬 공기가 채우면서 선선해지곤 합니다. 비와 더위가 하루건너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는 많았으나, 이번엔 비가 그치자마자 무더위가 찾아온 건데요. 기존 여름철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후 패턴은 ‘기후 변화’의 여파로 보입니다.
폭우와 폭염이 교차하며 찾아오는 극단적인 날씨는 엘니뇨 현상이 영향을 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엘니뇨는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지는 현상을 말하는데요. 수증기 증발량을 높이면서 집중 호우를 부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열대 동태평양 수온이 올라가면 우리나라 남부 등지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곤 하는데요. 4일(현지시간) 세계기상기구(WMO)는 현재 엘니뇨가 발달하는 상태로, 7~9월 엘니뇨가 발생할 확률이 무려 90%나 된다고 밝혔습니다. 5월(80%)보다 엘니뇨 발생확률을 10%포인트 높여 잡은 겁니다.
WMO는 이번 엘니뇨가 연말에는 최소 ‘중간급’ 이상의 강도로 발달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중간급 이상 엘니뇨는 열대 태평양의 최대 해수면 온도 편차가 1.0도 이상인 경우를 말하는데, 2016년 전 세계에 기록적 폭염을 불러온 엘니뇨 역시 ‘중간급 이상’으로 분류된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폭염을 부르는 강력한 엘니뇨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엘니뇨는 지구 온도를 높이는 주요 요인입니다. 지구의 기온이 전반적으로 오르면 더위도 강해지고, 저기압도 자주 발달합니다. 지구 온도가 상승하면서 발생하는 열과 수증기는 대기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키죠. 이미 전 세계 곳곳에서 이미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지구 평균 온도도 인류의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우려를 더했습니다. 이날 영국 BBC 등에 따르면 미국 국립환경예측센터는 3일 지구 평균 기온이 17.1도를 기록하며 이전 기록을 경신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전 기록은 2016년 8월에 관측됐던 16.92도였습니다.
지구의 온도 상승은 적도 부근 기온이 올라가는 엘니뇨 현상과 인류의 지속적인 이산화탄소 배출이 결합해 많은 열이 발생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됐는데요. 레온 시몬스 미국 국립환경예측센터 연구원은 “엘니뇨 현상이 이미 시작돼 향후 1년 반 동안 고온이 지속될 것”이라며 “이같은 기록이 더욱 자주 깨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극단적인 날씨가 나타나는 건 한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스페인에서는 지난달 낮 최고기온이 44도를 기록했고, 중국은 폭염으로 사상 첫 ‘고온 적색경보’가 발령됐습니다. 중국의 고온 경보는 청색·황색·주황색·적색 등 4단계로 나뉘는데, 가장 높은 단계인 적색경보는 최고기온이 영상 40도 이상으로 예상될 경우에만 발령되죠.
멕시코에서는 폭염으로 지난달까지 벌써 1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멕시코 보건 당국에 따르면 지난달 12~25일 폭염과 관련해 1000여 건의 응급상황이 발생했고, 104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예년보다 장마가 빠르게 끝났고, 곧바로 폭염이 찾아왔죠.
폭우와 폭염이 교차하는 등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는 장마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런데 장마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많은 비가 내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실제로 지난해 8월에는 장마가 끝났는데도 물폭탄이 쏟아지는 ‘2차 장마’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장마가 시작되는 6월부터 태풍이 발생하는 초가을까지 호우에 유의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2차 장마 등 기후 변화가 두드러지면서, 기상청은 시민 혼란을 우려해 2008년부터 공식적인 장마의 시작일과 종료일을 발표하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과거 정체전선의 이동을 살피면서 강우 지역과 시간을 예측했다면, 최근엔 기후 변화로 ‘변수’가 많아졌습니다. 장마 기간 발달한 저기압의 영향으로 비구름대 이동은 더욱 빨라졌고, 덥고 습한 남풍이 유입되는 등 기상 예측 요인이 더 복잡해졌죠. 이에 기상청이 예고한 ‘가끔 비’는 ‘기습 폭우’로 나타나는가 하면, 맑은 하늘이 이어져 장화를 챙겨 신고 나온 사람들을 멋쩍게 하는 일이 잦았는데요. 특히 올여름엔 엘니뇨 현상으로 대기가 더욱 불안정해져 예상 밖의 폭우나 더위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에 ‘장마’라는 용어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기상청은 지난해 10월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기후 위기 시대, 장마 표현 적절한가’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습니다. ‘1년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때’라는 장마의 의미가 퇴색된 만큼, 다른 용어를 찾고자 한 겁니다. 학술대회에 참석한 정용승 고려대기환경연구소장은 “장마철 강수 지속 시간이 크게 변했고, 단속적인 소나기와 국지적 폭우가 잦아지고 있다”며 “오랫동안 사용해 온 용어인 ‘장마’ 표현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죠.
실제로 지난해에는 장마가 끝난 후인 8월에 물폭탄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수도권과 중부지방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속출했는데요. 서울엔 1시간 동안 무려 141㎜가 쏟아지면서,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115년 만에 가장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불어난 빗물이 저지대에 쏠리면서 강남역이 물에 잠기고, 운전자들이 차량을 버리고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관악구 신림동에서는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살던 발달장애 가족 3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기상청은 10월 사회 각 분야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대회를 열고 장마 용어 재정립을 논의할 계획입니다. 다만 장마라는 말이 한반도에서 500년 넘게 사용된 만큼, 용어를 대체하는 작업에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6일까지는 전국이 대체로 맑은 가운데, 더위도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그러나 7일엔 장마전선이 다시 북상하면서 남부지방과 충청권 일부에 장맛비가 내릴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번에도 강하게, 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미 많은 비로 지반이 약해진 상태에서 또다시 비가 내릴 것으로 보이는 만큼, 기상 예보를 수시로 확인하면서 저지대 침수와 하천 범람, 산사태, 축대 붕괴, 토사 유출 등 호우 피해에 주의해야 합니다. 기상청은 해안가와 하천, 계곡 등 출입을 자제하고 시설물 관리와 안전사고에 각별히 유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