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엔 한 명의 콘텐츠 제작자가 혼자서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겁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18일 금요일. 강남 언주역에 한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근무하는 직원들은 단 세 명이었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사무실에서 이준호 플라스크(Plask) 대표를 만났다. 플라스크는 주 1회 재택근무제를 해 직원들 대부분이 금요일에 재택 중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직원 스무 명이 근무하는 회사의 대표가 됐다.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2022 아시아에서 주목할만한 100개 스타트업’으로 선택될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은 기업이다.
올해엔 포브스의 ‘30세 이하 리더 30명’(30 under 30, 써티 언더 써티) 아시아 미디어, 마케팅&애드버타이징 부문에 공동창업자 유재준 이사와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플라스크는 네이버,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KT인베스트먼트 등의 후원을 받는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업이다. 플라스크가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는 초보자가 웹캠만으로 게임이나 비디오콘텐츠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플라스크의 소프트웨어는 웹캠을 통해 포착된 사람의 움직임을 모션 데이터로 바꾸며 애니메이션 작업 대부분을 자동화한다.
그는 “현재 캐릭터 생성과 단순한 동작에만 활용되는 기술이 진보해 한 명이 ‘토이스토리’와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솔루션이 등장할 것”이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아이템도 없이 사업 결심 = 이준호 대표는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를 재학 중이던 2020년에 같은 학번 동기였던 유재준(신소재공학과) 이사와 공동 창업했다. 이 대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사업 아이템을 찾았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창업 후 아이템을 발굴한 경우라고 한다.
그는 “아이템 영감이 생겨서 만드는 경우와 일단 창업을 한 후 아이템을 나중에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창업하거나 졸업 후에 바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2017년 대학입학 후 학내 창업지원센터 매니저 활동과 기술창업 행사 등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창업 관련 활동을 하면서 동문 선배들의 창업 일화를 많이 듣게 되며 꿈을 키우게 됐다.
그는 “청각장애인용 인공지능(AI) 음성인식 실시간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소리를보는통로(소보로)와 사용자 선호 콘텐츠 추천 플랫폼 데이블의 창업 일화를 듣고 멋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꼭 한번 창업하고 싶었던 마음은 생겼다”며 “반 친구였던 유재준 이사가 교내 인큐베이터에 있으니까 도와준다고 했고, 팀이나 작업 얘기하다 잘 맞아서 같이 해보기로 했다”고 일화를 설명했다.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창업 영향도 있었다고 했다.
“작은 학교 교수셨던 아버지가 인공지능(AI)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하셨는데, 내가 했다면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딥페이크에서 모션캡처 솔루션으로 = 사명 플라스크는 얼핏 떠오르는 과학 실험실에서 쓰이는 유리 실험기구 플라스크(Flask)와는 다른 플라스틱(Plastic)과 마스크(Mask)의 합성어다.
창업 초기 아이템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인 ‘딥페이크’여서 이를 플라스틱 마스크라고 정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투자자들과 게임회사 엔지니어들을 만나면서 3D 애니메이팅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좀 더 기술적인 영역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제품화에 앞서 AI를 먼저 만들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첫 아이템 이후 더 많은 사람 쉽게 창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원하는 가상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들어주는 코믹툴과 낮은 비용으로 모션캡처가 가능한 솔루션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포브스도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에 필요한 고가의 전문 모션캡처 장비와 촬영 공간이 없어도 일반 카메라로 사용자의 움직임을 애니메이션에 쓸 수 있는 뼈대 움직임으로 바꿔주는 기술에 주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추어 제작자뿐 아니라 글로벌 게임회사와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도 플라스크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하이엔드 사용자(워너브라더스)의 경우 프리 비쥬얼라이제이션(사전 제작 영상)과 기획이나 프로토타입(초기 시연 작품) 만들 때 쓰인다”며 “예산이 적은 스튜디오에선 실제 프로덕션에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인 창업자의 꿈 모두 실현할 수 있는 솔루션될 것” = 모든 사람이 원하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솔루션을 만드는 게 이 대표의 목표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가 태어날 때 창조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본다”며 “어릴 때 성(城)을 만들거나 노래를 부르며 무언가를 창작하는데, 나이 들어서 그런 일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림을 원하는 품질로 그리려면 못해도 4년 이상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나 쉽고 빠르게 창작 그 자체의 즐거움이 많아지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플라스크는 사용자들이 작업을 개별 컴퓨터가 아닌 클라우드로 작업할 수 있어, 고성능의 컴퓨터 장비가 없어도 되는 게 장점이다.
이 대표는 “브라우저 위에서 모든 3D 조작이 가능하다”며 “설치가 필요 없고 사용자들의 모든 행동을 실시간을 분석해 제품 개선이나 사용자 유입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플라스크의 모션캡처 솔루션은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사용 중이다. 일본 대형 게임제작사 스퀘어에닉스와 넥슨,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와 소니픽쳐스 산하 이미지웍스 등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그는 “현재 단순 이미지를 만드는 코믹스 다음 버전으로 짧은 움직임을 구현하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카메라 워크가 만들어지면 10년 뒤엔 1인 제작자가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환경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동차와 반도체, 가전제품 등 세계적인 제품을 만드는 국내 하드웨어 업체는 있지만, 소프트웨어(SW)는 없다는 점은 항상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
이 대표는 “케이팝과 K드라마, K영화 등이 잘 되고 있지 않나”라며 “한국의 첫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는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