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갈등 확증편향에 더 악화돼
전문가의견 믿고 합리성 따지길
원자력 발전소 건립 초창기, 주민들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핵폐기물’이 나온다는 공포감을 갖고 있었기에 발전소가 세워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이때 주민들의 공포를 완화시켜주는 데 사용되었던 개념이 ‘원자력 부산물’이었고, 원자력 부산물은 안전한 관리가 가능하다는 과학자들 주장이 설득과정에 동원되었다. 핵폐기물이냐 원자력 부산물이냐에 따라 동일한 실체에 대한 우리네 인식이 180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의 하나다.
8월 24일 오후 1시를 기점으로 시작된 후쿠시마 원전 방류수를 놓고 오염수로 부를 것이냐 오염 처리수로 부를 것이냐를 두고 신경전이 치열하다. 이 대목에서‘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대로 이 세상이 존재한다’고 했던 미국 사회학자 피터 버거(1929~2017)의 혜안이 떠오른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했던 우리네 속담도 떠오르고.
오염수냐 처리수냐 뒤에는 오염수라고 했을 때 정치적 실익이 더 크다고 믿는 쪽과, 처리수에 방점을 찍는 것이 두루 유리하리라 믿는 편이 팽팽히 충돌하고 있기에, 논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정치권의 이해득실이 전문가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있으니, 앞으로 진행될 과정과 결과는 요즘식 표현으로 ‘안 봐도 비디오’다.
개념이나 슬로건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 속에는 의미심장한 사례들이 다수 등장한다. 대표적 사례로는 낙태를 둘러싼 슬로건 경쟁을 들 수 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태아도 생명체임을 부각시킨 슬로건으로 “프로 라이프(pro life)”를 선택했고, 여성의 임신 및 출산 결정권에 주목한 페미니스트 진영에서는 “프로 초이스(pro choice)”를 내걸었다. 역사적 슬로건 대결에서 후자가 완패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훗날 ‘이기적 유전자’로 베스트셀러 작가 명단에 오른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1941~)는, 실상 두 입장 모두 생명을 중시하는 프로 라이프라 할 수 있는데 한편은 태아의 생명을, 다른 한편은 여성의 삶을 중시한다고 봐야 한다는 해석을 내린 바 있다.
개념을 바꾸면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예도 많다. 예전엔 결손(缺損)가정 혹은 편(偏)부모라 불렀지만, 요즘은 한부모 가족 혹은 모자(부자) 가족이라 바꿔 부르면서 이들 가족을 향한 편견이나 그릇된 고정관념이 완화된 것은 사실이다.
출산보다는 출생이라 하자, 폐경보다는 완경이 옳다는 주장들 또한 서서히 설득력을 확보해가고 있다. 미혼 대신 등장한 비혼 개념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당사자들로부터 환영받고 있고, 아직은 널리 쓰이지 않지만 장애인 대신 “육체적 도전을 받은(physically challenged) 사람”으로 부르자는 시도도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관건은 개념이나 슬로건이 정쟁의 대상이 될 때, 내편 네편 논리에 과몰입되지 않은 채 건전한 상식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일 텐데, 별 뾰족한 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이나 했듯이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1938~)는 ‘성찰(省察)’을 주요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현대로 접어 들며 폭증한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 진정성, 자정능력을 믿되 전문가 집단 사이에도 관점 및 견해 차이가 있고 해석 및 분석상의 차이도 발생하는 만큼, 전문가가 근거로 내세우는 데이터의 객관성, 논리의 일관성, 주장의 합리성 등을 꼼꼼히 체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성찰이야말로 현대인의 필수 미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내전이라 불릴 만큼 갈등과 충돌이 심각한 우리네 상황에서는 기든스가 제안하는 성찰이 세상물정 모르는 지식인의 한가한 소리로 폄하될 가능성이 높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의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이 선호하는 매체나 커뮤니티에 접근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확인받는 “확증편향”이 그 어느 때보다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성찰의 지혜를 포기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옳은 방향도 아닌 것 같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성숙한 시민의식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때다. 우리에게는 금과옥조로 삼아도 좋을 경험이 축적되어 있고, 타산지석이 되어줄 실례도 넘쳐나지 않던가.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지 못해 낭패를 보았던 아픈 기억 또한 되새김질해보면서, 오염수냐 오염 처리수냐 논쟁도 슬기롭게 마무리할 수 있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