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가치높아 이해관계 얽혀
민관협력 두고 정부개입 주목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을 구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배터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배터리는 전기차,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 휴대용 전자기기, 첨단 가전제품, 로봇 등 4차산업을 대표하는 산출물을 더 나아지게 하는 동력원으로 꼽힌다. 리튬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전달하는 배터리 생산에 필수적인 요소로, 최근 배터리 시장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핵심 광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리튬 확보는 대표적인 신산업인 배터리 분야의 가치사슬을 둘러싼 국가 간 또는 기업 간 힘겨루기에서 필수적인 고려 사항이 되었다.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세계 산업 질서 속 배터리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려면 핵심 원자재인 리튬에 대한 안정적 접근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리튬 확보가 국가와 기업의 전략적 우위로 연결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리튬이 여러 나라에서 쉽게 채굴되고 가공될 수 있었다면, 높아지는 수요에도 불구하고 리튬의 전략적 가치가 이렇게까지 높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튬은 아직 소수의 국가에서만 채굴과 가공이 이루어진다. 최근 리튬 가격 폭등이 여러 차례 관찰되고 리튬을 채굴하거나 가공할 수 있는 국가가 주목받게 된 이유다. 자국 우선주의와 자원민족주의의 심화로 4차산업혁명의 동력원이 되는 핵심 광물의 확보가 국익과 직결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미국 지질조사국이 발표한 2023년 기준 국가별 리튬 매장량 자료를 살펴보면, 칠레에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35.8%인 930만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실공히 리튬 매장량 세계 1위 국가다. 또한, 미국 지질조사국은 2021년 전 세계 리튬 생산량을 10만7000톤으로 추산했는데, 이 중 칠레가 3만 톤을 생산해 28.3%를 담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생산량의 51.7%를 담당하는 호주에 이어 세계 2위 생산량이다.
칠레에는 살라르 데 아타카마라고 불리는 염전이 있는데, 칠레 리튬 생산의 거의 전부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채굴 기업은 리튬을 함유한 염도가 높은 물을 추출한 뒤, 이를 증발시키고 농축시킨 다음 불순물을 제거해 리튬을 추출한다. 살라르 데 아타카마의 존재로 칠레는 가장 효율적인 리튬 생산국 중 하나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리튬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오르자 자연히 칠레 정부는 리튬을 어떻게 관리하고, 리튬을 매개로 어떻게 국가 발전을 도모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칠레에서 리튬을 둘러싼 정치·경제는 복잡하고,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으며, 이에 따라 논란의 여지도 많다.
리튬은 수출 확대, 세수 확대, 배터리 가치사슬 진입, 외국인투자 등 경제 발전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리튬의 채굴과 리튬 산출물의 생산을 관리하고 규제하려는 정부와 외국인 기업 간 갈등 문제는 풀어야 할 숙제다. 채굴권 신규·연장 계약 문제나 외국인 기업, 정부, 지역사회 간 이익 분배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저마다 다른 시각으로 리튬을 바라보고 있다. 외국인 기업에 리튬 채굴이 확대 허용되면, 칠레가 배터리 가치사슬의 채굴 공정에만 특화돼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공정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리튬 채굴이 불러올 수 있는 환경 파괴 문제와 지역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이러한 가운데, 칠레의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은 지난 4월 국가 차원의 리튬 정책을 발표했고, 6월에는 정책 세부 사항을 밝혔다. 많은 이들이 보리치 대통령의 이념적 성향이나 그동안의 정치적 행보로 비추어 보아 칠레의 리튬 산업이 국유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보리치 대통령은 그간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나타내 왔으며, 전략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표된 리튬 정책의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보리치 정부가 리튬 산업의 완전한 국유화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관 협력을 통해 리튬 산업의 확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확장하는 리튬 산업 전반에서 국가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민간 기업에 대한 리튬 채굴 허가를 늘리고, 신규 채굴 사업은 국영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새로운 정책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지만, 리튬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리튬 정책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행정부가 고도의 균형감각을 발휘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