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정치와 분리돼야 하며, 스포츠를 통해 평화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스포츠 정신입니다. 하지만 냉혹한 정치역학관계 속에서 스포츠 정신이 발현되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김수현(28·부산시체육회)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역도 여자 76㎏급 경기에서 값진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이 경기는 북한 역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무대였는데요. 북한의 송국향(22)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합계 267㎏를 들며 대표팀 동료 정춘희(25·266㎏)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로써 북한은 5일까지 여자 역도에 걸린 금메달 5개를 싹쓸이했죠.
금메달리스트 송국향은 북한 역도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휩쓴 비결을 묻자 울컥해 잠시 말을 멈춘 뒤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훌륭한 제자의 뒤에는 훌륭한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우리의 성과 뒤에는 감독 동지들의 수고가 있다. 이런 훌륭한 감독 지도자를 널리 자랑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오늘의 목표는 이 기록(267㎏)이 아닌 세계 기록(북한 림정심의 278㎏)이었다. 정말 아쉽게 됐다”며 “오늘 중국 선수(랴오구이팡)가 이 자리(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부상이 심하지 않은지 걱정된다”고 말했는데요. 정춘희도 “중국 선수가 오늘 생일인데 축하 인사를 전한다”며 “중국 선수가 빨리 나아서, 실력으로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고 인상 경기 중 다쳐 용상을 표기한 랴오구이팡을 걱정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선 동메달의 주인공이 김수현이 아니라 랴오구이팡이 되길 바랐다고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 응하지 않거나, 기자회견에 불참하고 있는데요. 2일 탁구 종목에선 북한 차수영-박수경 조가 우리나라의 신유빈-전지희 조에 패해 금메달을 놓친 뒤 기자회견에 불참했습니다. 이튿날에는 여자 농구 4강전에서 중국에 56점 차로 대패한 뒤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았죠.
패한 선수도 아닌 금메달리스트가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않는 모습도 포착됐습니다. 4일 이번 대회 여자 복싱 54㎏급 결승에서 승리해 금메달을 따낸 ‘복싱 영웅’ 방철미는 경기 후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답하지 않았고, 기자회견에도 불참했습니다. 여기에 동메달리스트들도 불참하면서 이날 기자회견은 은메달의 창위안(중국)만 참석하게 됐죠.
방철미는 이번 대회 북한을 대표하는 ‘기수’로도 나섰다는 점에서 그의 불참이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북한은 특히 한국, 일본과 맞붙었을 때 냉랭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상대 선수의 인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단체 사진 촬영을 거부하기도 하는데요. 지난달 25일 중국 항저우 샤오산 린푸 체육관에서 열린 유도 남자 73㎏ 이하급 16강전에서 한판승을 거둔 북한의 김철광은 강헌철(용인시청)이 다가가자, 그를 외면하고 몸을 돌려 경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악수를 거부하는 건 예의를 중시하는 유도에선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유도는 경기를 치른 두 선수가 악수하고 서로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것이 관례죠. 더구나 김철광은 2018년 국제유도연맹(IJF)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으로 뛰었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같은 날 열린 사격 10m 러닝타깃 남자 단체전 시상식에선 한국과 북한 대표팀 선수들이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올라섰는데요. 북한 선수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습니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는가 하면, 수상자 전원이 금메달 시상대에서 관례로 찍는 단체 사진 촬영도 거부했죠.
이 밖에도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서 단일팀을 구성했던 여자 농구에선 맞대결 뒤 북한 선수가 한국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후문까지 들리는 등 냉랭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북한의 태도엔 경색된 한반도 정세가 스포츠까지 이어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최근 심화하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영향을 줬다는 겁니다.
통상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는 스포츠를 매개로 국가 간 화합을 도모하는 것으로, 정치적 이해와 결부하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전쟁을 멈추기도 했다고도 하죠.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국제 대회에선 불가능에 가깝죠. ‘올림픽은 정치로부터 중립성을 갖는다’는 표어는 오히려 올림픽이 수없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돼 왔음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요소입니다. 냉전 시대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대립 구도가 심화하면서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은 각 진영만 참가하는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기도 했죠. 국제 대회가 정치적 매개체로 전락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국제 스포츠 대회가 정치적 타협과 평화 도모의 장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북 단일선수단이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을 달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당시 선수들은 함께 시상대에 오르고 사진을 찍으며 화합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모습은 이번 대회에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북한은 일본과의 대결에선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줘 전 세계를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북한 축구대표팀의 난동을 두고 “노동단련대에 끌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아사히 신문 글로벌판은 ‘북한 남자 축구 대표팀이 일본에 패한 후 심판에게 달려간 5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북한 선수들의 행동을 분석했는데요. 우선 경기 성적에 따라 달라지는 선수들의 처우가 영향을 줬다는 의견입니다. 신문은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북한 선수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중요한 장소”라며 “선수들은 8강전에서 패하면 다음 국제 대회에 나올 기회를 받지 못할 수도 있고, 노동단련대에 끌려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노동단련대는 아니더라도 최소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며 군대에 가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며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남겼다면 더 큰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죠.
그 밖에 다른 이유로는 △국기를 걸고 싸우기에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는 점 △북한 내에서 축구는 가장 인기가 많은 종목 중 하나라는 점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주목하는 스포츠라는 점 △북한 내 반일 감정이 강하다 보니 일본에 지는 것은 국민 정서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망명한 고영환 한국관광대 겸임교수는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적국’ 일본과 맞서는 경우 강경한 태도로 상대를 쓰러뜨리라는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지시했거나, 적어도 (선수들의 행동 방침을) 결재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는데요. 이 말은 선수나 코치가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시안게임은 같은 대륙, 45억의 아시아인들끼리 화합하고 우정을 나누는 아시아 최대 종합 스포츠 축제입니다. 슬로건도 ‘마음이 서로 통하면 미래가 열린다’(Heart to Heart, @Future)로, 인류의 화합과 소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부 경기에서는 화합을 도모하는 모습이 아닌, 정치적 요소에서 비롯된 감정싸움이 포착돼 스포츠 정신을 기대한 이들을 실망케 하는데요. 대회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 만큼, 남은 경기에서는 체육인 간의 덕목과 예의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