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가격은 그대로 두고 양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에 더해 ‘스킴플레이션’이 늘고 있다고 한다. 스킴플레이션은 ‘인색하게 아낀다’는 스킴프(skimp)와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로 재료나 서비스에 들이는 비용을 줄이는 행태를 가리킨다. 물가 전선에서 편법과 반칙이 난무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어제 “충분히 공지도 않고 슬그머니 중량 표기만 바꾸는 것은 꼼수”라고 했다. 앞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정직한 판매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시장은 ‘슈링크’를 넘어 ‘스킴’으로 내달리고 있다. 국내외 물가인상 압박 요인과 당국의 인상 자제 요구 사이에서 다들 애타게 살아남을 공간을 찾고 있다는 얘기다.
인플레이션은 화폐 가치의 상대적 하락을 가리킨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라고 했다. 우리 정부 역시 통화정책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당국은 한편으론 정책금융 등으로 시중 통화량을 키우면서 다른 한편으론 업계 팔을 비틀고 있다. 시장 혼란·혼탁을 부추기는 행태다. 급기야 이제 기업의 ‘꼼수’를 탓한다.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것인가.
당국은 최근 각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지정했다. 민감 품목의 전담자도 지정해 가격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2012년 이명박 정부 시절 ‘MB식 물가안정 책임제’에 등장했던 ‘빵 서기관’, ‘라면 사무관’의 재림이다. 뭔 효과를 볼 것인가. 땜질 처방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지 묻게 된다.
슈링크·스킴플레이션이 업계가 택한 꼼수라면 ‘빵 서기관’, ‘라면 사무관’은 물가 당국이 택한 꼼수다. 한심하고 불합리하기로는 후자가 훨씬 더하다. 정부가 왜 과도한 정책 엇박자로 통화정책을 무력화하면서 이길 수 없는 싸움만 골라하는지 알 길이 없다. 당국은 차라리 미국이 어찌 물가와 싸우는지 돌아봐야 한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기준금리를 0.25%에서 5.50%로 인상했다. 이 기간 시중 통화량(M2)은 5% 이상 줄였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난해 6월 9.1%로 정점을 찍은 뒤 올해 10월 3.2%까지 떨어졌다. 애초 한국보다 심각했던 미국 물가는 여전히 낙관이 어렵지만 그래도 희망은 엿보게 됐다.
한국은 다르다. 같은 기간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연 3.50%로 올렸다. 그런데 통화량은 3652조 원에서 3840조 원으로 5% 이상 늘었다. 미국과 정반대다. 통계청에 따르면 10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13.37(2020년=100)로 1년 전보다 3.8% 올랐다. 역주행을 하는 감이 없지 않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말 예금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역대 최대 규모인 1086조6000억 원이다. ‘화폐적 현상’을 외려 악화시킨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물가관리를 진정 원한다면 통화·재정정책을 원점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만 탓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