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재발을 방지하고 근본원인을 찾겠다며 29명의 전문가로 팀을 꾸렸다. 전산 장애도 국가적 재난으로 지정하고 대기업에 전산업무를 허용하라는 바람이 일었다.
며칠 후에 L4 스위치가 아니라 전단에 놓인 라우터 연결단자의 불량으로 원인이 정정되었다. 연결단자 불량 원인을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왜냐 하면 아날로그 대신 디지털로 기술혁명이 일어난 후에 고장 난 부품을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인건비를 고려하면 고장 난 부품을 힘들게 찾아 교체하기보다는 기판을 통째로 교체하는 편이 유리하다.
며칠 사이에 고장원인이 바뀌었듯이 더 깊게 파고들면 고장원인도 바뀔 수 있을까? 체계적 설계기술과 검증 기술을 이해하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고장 난 부품을 찾는 방법은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이 기술은 독재 국가에서 불순분자를 찾는 방법과 동일한데, 국가는 영토를 계층적으로 나누어 주민을 감시하고 상부로 보고한다. 비슷하게 기기에서도 작업명령을 내려 응답이 없으면 이는 고장 부품이다. 이론적으로 확실한 검출방법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기기 안의 모든 부품에 대해 일일이 적용하기 어려워 중요 부품에 대해서만 적용하고 기록에 남긴다.
통신이론도 체계적이다. 통신의 송신자와 수신자는 데이터를 보내거나 받을 때 7단계 결재를 거친다. 통신 선로에서 L4 스위치는 4단계 결재로 통신부하를 조절한다. 통신 기기에는 다양한 데이터 조합이 들어오는데 어떤 조합에도 7단계 혹은 4단계 결재 이론이 확실히 작동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만일 결재 이론에 근본 문제가 있다면 부품의 노화는 쳐다볼 필요도 없다. 놀랍게도 통신 기술자들은 통신이론의 무결점성을 긴 세월 수학적으로 증명해 냈다.
그런데 수학적 증명에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검증 완벽성에 의심이 일 수도 있다. 수학은 1, 2, 3 자연수와 사칙연산으로 이루어지는데 1, 2, 3의 근거가 뭐냐고 질문을 하면 답하기가 어렵다. 영국 수학자 러셀은 1, 2, 3을 설명하기 위해 수백 페이지의 심오한 이론을 전개했는데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다. 그냥 개체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는 척도로 1, 2, 3을 이해하는 편이 낫다. 1, 2, 3 외에도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뻔한 수학적 사실들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공리’라고 부른다. 공리를 증명하기 위해 수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1920년대 수학자 괴델은 공리 증명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1, 2, 3의 공리가 증명되지 않았지만 1, 2, 3이라는 개념은 고대나 현대에서나 동일하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과학혁명 시기에도 1, 2, 3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증명은 없지만 1, 2, 3의 공리는 너무나 탄탄하다. 통신이론이 탄탄한 1, 2, 3의 공리와 수학적 증명을 통과했으므로 이제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고 이번 L4 스위치의 고장원인도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29명의 전문가들도 고장원인을 밝혔지만 이름 공개를 꺼렸다. 국가를 마비시킨 사건을 조사했는데 조그만 스위치 고장이라 김이 팍 샌 탓이리라. 근대 철학을 연 데카르트는 20세에 법학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배울 것이 없다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는 30년 종교 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하였다. 병영 침대에 누워 천장을 기어가는 파리를 보고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직교좌표를 발명했다. 직교 좌표는 기하학과 대수학을 융합시켜 대수기하학을 탄생시켰다.
하찮은 파리에서 탁월한 도구를 발명했듯이 29명의 전문가는 교훈을 얻을 수 없을까? 이번 사건에서 나온 대책은 오래된 부품을 교체하라는 뻔한 제안과 기기 정비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수행하라는 비인간적인 권고였다. 이런 사고가 한두 번 더 일어나면 보신주의 탓에 부품의 보증기간은 1년으로 단축되고 엔지니어의 달력에는 휴일이 사라질 듯하다. 사회의 퇴행을 막고 진보하려면 과거로 회귀하려는 습성을 극복해야 한다. 부품 고장이나 사용 실수를 고려하지 않는 설계에 비해 신뢰성 있는 설계는 개발 노력과 비용이 5배 이상 들어가지만 이런 목표를 포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