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은 11일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위해 출국했는데요. 이 회장, 최 회장과 함께 빌렘 알렉산더 국왕,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의 안내를 받아 ASML 본사 주요 시설을 시찰할 계획입니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네덜란드와의 ‘반도체 동맹’을 구축하는 걸 핵심으로 삼습니다. 10일 공개된 AFP와의 서면 인터뷰에서도 윤 대통령은 “‘반도체 협력’은 이번 순방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죠. 이번 순방에 이 회장과 최 회장을 대동한 것도 반도체 생산 세계 1위인 우리 반도체 산업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ASML은 한국과 인연도 각별합니다. ASML은 1996년 국내에 진출해 현재 2000명 이상의 직원을 두고 있는데요. 윤 대통령은 베닝크 CEO의 방한을 계기로 두 차례 만나 반도체 협력 관련 대화를 나눈 바 있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사실 이들 기업뿐 아니라 TSMC, 인텔 등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ASML과의 연을 강조하며, 아니 호소하며(?) 줄을 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ASML은 ‘슈퍼 을(乙)’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죠.
ASML은 극자외선(EUV)을 이용한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입니다. 네덜란드 시가총액 1위인 ‘국민 기업’이죠.
EUV 노광장비는 7나노 이하의 고사양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데요. 이를 활용하면 짧은 파장으로 세밀하게 회로를 그려 넣을 수 있습니다. 고사양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한 2010년대 들어서 ASML도 반도체 업계에서 관심을 받았습니다.
ASML은 이 장비를 만드는 세계 유일의 기업입니다. EUV 노광장비는 한 대당 가격이 2500억 원에 이르는데요. 문제는 한 해 판매량이 많으면 40여 대에 불과해, 전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들도 장비를 납품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한다는 겁니다. ASML은 지난해 자사 행사를 통해 EUV 생산 능력을 2026년까지 90대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에 장비 보유 대수는 사실상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의 척도로 작용합니다. 장비를 확보하는 시점과 수량에 따라 기업의 로드맵이 구축되는데요. EUV 계약이나 확보 소식이 전해지면 기업 주가 급등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그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인 TSMC는 이 장비를 쓸어가듯 했습니다. 현재 EUV 노광장비를 필요로 하는 파운드리사는 삼성전자, TSMC, 인텔 3개 사와 제조사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5개 사인데요. 이 가운데 TSMC 공급 비중이 무려 70%에 달합니다. 경쟁사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달가운 소식일 수가 없죠. TSMC는 이를 앞세워 시장 점유율 격차도 벌리고 있습니다. 대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3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에서 TSMC는 57.9%, 삼성전자는 12.4%를 기록했습니다. 양사 간 점유율 격차는 44.7%(2분기)에서 45.5%(3분기)로 더 확대됐죠.
삼성전자는 격차를 줄이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다수의 EUV 장비 공급계약을 맺은 것으로도 전해졌는데요. 대만 생산기지에 100대 이상의 EUV 장비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TSMC를 넘어서기 위해선 향후 장비 50대 정도를 추가로 사들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현재 40여 대의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도 2025년 말까지 4조7550억 원어치, 장비 약 24대를 추가로 들여오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ASML이 한국에 장비를 덜 팔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ASML 연례 보고서의 세계 매출액을 보면 TSMC를 필두로 한 대만이 80억9550만 유로(약 11조4800억 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는 한국이 60억4560만 유로(8조5734억 원), 중국이 29억1600만 유로(4조1352억 원), 미국이 19억9130만 유로(2조8239억 원), 일본이 10억860만 유로(1조4303억 원) 순으로 나타났는데요. 전년 대비 다른 국가들은 매출액이 증가했지만, 한국은 감소했습니다. 1위 대만의 경우 2021년 73억2790만 유로에서 80억 유로 이상으로 늘었고, 3위 중국도 27억4080만 유로에서 29억 유로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한국은 62억2300만 유로에서 60억 유로 수준으로 감소했죠. 매출 비중으로 따져봐도 33.4%가량에서 29%로 줄었습니다.
이에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6월 유럽 출장 중 직접 ASML 본사를 찾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의 방한 당시엔 베닝크 CEO와 차담회를 가졌죠. 이때 이 회장은 베닝크 CEO와 반도체 기술 트렌드, 반도체 시장 전망은 물론 중장기 사업 방향 등 폭넓은 내용에 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성전자는 ASML 지분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12년 지분 3.0%를 약 7000억 원에 매입했는데요. 이후 일부 매각하긴 했지만, 협력과 장기투자 차원에서 올해 9월 말 기준 여전히 ASML의 주식 158만407주(0.4%)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도 2021년 ASML과 5년간 4조7000억 원 규모의 EUV 장비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협력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ASML이 세계 최대 반도체 연구소인 벨기에 아이멕(IMEC)과 내년 선보일 차세대 EUV 장비, 하이 뉴메리컬어퍼처(NA) 테스트랩에서 ASML과 기술 개발에도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번 네덜란드 순방에서 이 회장, 최 회장과 함께 펠트호번에 있는 ASML 핵심 시설인 ‘클린룸’도 둘러볼 예정인데요. 외국 정상으로서 최초입니다. 또 ASML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인들과 함께 전문인력 양성, 차세대 기술 연구 개발 협력 방안 등도 논의할 예정이죠.
윤 대통령은 반도체 강국 네덜란드와 ‘반도체 대화체’를 신설하는 등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대폭 강화해 나갈 방침인데요. 이번 ASML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투자를 적극 요청할 것으로 풀이됩니다.
한국 반도체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ASML은 2025년까지 총 2400억 원을 투자해 화성에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인 ‘뉴 캠퍼스’를 짓습니다. 여기에는 EUV 노광장비 관련 부품 등 재제조센터와 첨단기술을 전수할 트레이닝 센터, 체험관 등이 들어서는데요. 재제조센터는 고장이 나거나 성능이 떨어진 부품을 활용해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시설입니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에 연구·개발(R&D) 센터와 제조시설을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베닝크 CEO는 지난해 뉴 캠퍼스 기공식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고객의 비즈니스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며 “기술의 복잡성이 높아지면서 고객사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요. “향후 한국에서 R&D 센터를 늘려나갈 것”이라며 “기술이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우선 재제조센터로 시작하고, 지식 이전에 5∼10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이후 제조 기반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삼성전자는 2나노 공정에 열을 올릴 것으로 보입니다. TSMC보다 3년 이른 시점에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도입하면서 3나노 공정 기반 양산에 먼저 성공했지만, 시장 점유율에선 TSMC에 뒤진 상황입니다. TSMC는 현재 3나노까지는 핀펫(FinFET) 공정을 이용하고 있고, 2나노부터 GAA 기술을 활용할 예정인데요. 삼성전자는 TSMC보다 먼저 GAA 기술을 도입한 만큼 본격적으로 GAA 기술이 활용되는 2나노부터는 승산이 있다고 보는 셈입니다.
이 2나노를 양산하는 데에도 ASML의 하이 NA가 필수적입니다. 장비 도입 여부에 따라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의 생산성, 시장 선점 가능성도 달라질 수 있는데요. 삼성전자가 이 장비 도입 여부를 공식화하진 않았지만, 최근 2025년 하이 NA 장비 5대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기존 EUV 장비보다 가격이 2배 가량 비싼 이 장비는 1대에 무려 4000억~6000억 원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ASML은 2027~2028년까지 연간 생산할 수 있는 하이 NA 장비가 20대가 될 수 있도록 생산량을 안정화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전까지, 사실 ASML이 생산량을 확충하고 난 이후에도 장비를 둘러싼 반도체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이 이어지겠는데요. 네덜란드에서 관련 논의를 나눌 윤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어떤 성과를 안고 돌아올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