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반도체 공정 기술력은 미국의 제재가 무색할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최신 스마트폰, 노트북 등에 자국의 첨단 공정 반도체를 탑재하는 등 자급력을 크게 높였다. 중국은 우리나라 반도체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만큼 심해지는 미ㆍ중 대립 속에서 새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 화웨이는 지난해 12월 출시한 비즈니스 노트북 ‘칭윈L540’에 5나노미터(nm·10억분의 1m) 고사양 반도체 ‘기린 9006C’ 프로세서를 탑재했다.
기린 9006C는 화웨이가 2021년 출시한 노트북에 처음으로 들어간 반도체다. 그간 화웨이는 대만 TSMC의 5나노 공정을 통해서만 생산해왔는데 미국의 규제 이후로는 TSMC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번에 탑재된 기린 9006C 프로세서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 SMIC가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SMIC는 앞서 지난해 8월 화웨이가 출시한 5세대(5G) 이동통신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에 탑재된 7나노 칩 ‘기린 9000S’를 생산하기도 했다. ‘나노’ 앞의 수는 반도체 칩의 회로선폭 규격을 가리킨다. 미세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수치가 낮다. 사실상 SMIC는 강력한 미국 제재에도 불과 몇 개월 만에 자체 기술력을 크게 높인 셈이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화웨이의 새 노트북 모델에 한 세대 더 나아간 칩이 탑재됐다는 보도가 시장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며 "현재 미국의 규제 방식의 유효성은 갈수록 면밀한 검토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최대 검색 기업 바이두는 지난해 11월 화웨이의 인공지능(AI) 반도체 ‘910B 어센드(Ascend)’를 대량 주문했다. 이 칩은 화웨이가 미국 엔비디아의 A100의 대체재로 개발한 것이다. 그간 엔비디아를 고집했던 바이두가 화웨이와 손을 잡은 건 그만큼 자국 기술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중국 AI 소프트웨어 기업 아이플라이텍도 이 칩을 사용해 AI 모델을 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규제에도 오히려 기술력과 자급력을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향후 미국이 강도 높은 추가 규제를 진행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 경우 우리나라 기업의 피해도 우려된다.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 중 40%를 중국 시안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다롄 공장에서 전체 D램의 40%와 낸드플래시의 20%를 담당한다. 사실상 미국이 마음먹고,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면 우리 기업의 반도체 생산에 직격타를 맞을 수도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올해는 반도체 시장 전반에서 양국의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 기술을 자국 중심으로 끌고 가는데 우리나라는 반대로 해외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 부원장은 “현재 국내 기업의 반도체 생산망이 중국에 치우쳐 있는 상황”이라며 “무엇보다 첨단 공정은 국내에서 먼저 상용화를 완성시키고, 그 다음에 유럽이나 일본 등 여러 국가로 수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제재를 더 강화해 자국의 기술과 인력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재 역시 정부의 강력한 정책 아래서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부원장은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인력을 국내에서 ‘실무’, ‘운영 및 실행’, ‘설계 및 첨단 공정’ 등 세부적으로 나눠 골고루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