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립정부 불협화음으로 EU서 존재감 희미
NATO 동진 이슈 떠오르면서 동유럽 목소리
‘자국 우선주의’ 확산에 프랑스 경제 정책서 힘 얻어
6월 유럽의회 선거·11월 미국 대선 변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공공연한 유럽 대륙의 지도자로 평가됐다. 최초의 여성·동독 출신 총리인 그는 2005년 취임한 뒤 4번 연속 총선에서 승리하며 16년간 총리직을 수행했다. 실용적·포용적 정책을 펼치면서 시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무티(Mutti·엄마) 리더십’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메르켈 전 총리가 2018년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2021년 올라프 숄츠 총리가 그의 후임자로 나섰지만, 아직 뚜렷한 존재감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메르켈 전 총리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란 기대감이 커졌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강경하게 내세운 연금개혁안, 이민법 개정안 등이 야당과 시민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혼란에 빠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8일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를 해임하기까지 나섰다.
유럽 내 뚜렷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에서 누가 중요한지는 결국 사안에 달려 있다.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2020년부터 이어진 3년간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은 유럽의 권력 구도를 재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유럽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행동해 미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주변국인 폴란드나 슬로바키아는 미국이 이끄는 군사동맹인 나토에 기대는 것이 훨씬 낫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유럽연합군에 유럽산 군사 장비를 배치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요구는 사실상 묵살돼 왔다.
그럼에도 경제 정책과 관련해서는 프랑스의 주장이 우세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부상하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올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걱정도 한몫했다. 이런 부분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전략적 자율성’이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화에 대한 오랜 불신을 바탕으로 유럽이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중이다.
유럽에서 독일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독일의 신호등(사회민주당·빨강, 자유민주당·노랑, 녹색당·초록) 연립정부 내 불협화음이 이어지면서 EU 내부에서도 주도권을 잡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의회의 한 고위 관리는 이코노미스트에 “독일 연립정부는 유럽연합 내부 논쟁보다 느리게 움직인다”며 독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부재로 프랑스는 최근 EU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의 동의가 필요하다. 다만 현재로서는 숄츠 총리와 마크롱 대통령의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프랑스가 동맹을 모색할 만한 국가도 마땅치 않다. 이탈리아는 강경 우파로 알려진 조르지아 멜로니 총리가 이끌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멜로니 총리와 이념적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의 트럼프’로 불리는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 대표의 차기 총리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2019년부터 집행위원회를 이끌어 온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다. 차기 집행위원장 선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유럽의회 선거가 6월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11월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도 변수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EU의 대중 정책 기조로 ‘디커플링(탈동조화)’보다 ‘디리스킹(위험 제거)’을 주장해 왔다. 이 때문에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EU 전체에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와 독일,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의 투표가 유럽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유럽의 권력 구조가 여전히 진화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주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