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네 모습서 내가 보이네”…‘성난 사람들’ 통해 살펴보는 분노의 명암 [오코노미]

입력 2024-01-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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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넷플릭스)
지금 숯불 화로만 세 번째 반품하시는 거예요

숯불 화로 구매와 반품을 반복하는 이 남성은 한국계 미국인 대니 조(스티브 연 분)다. 대니는 이집 저집을 돌며 온갖 일을 도맡아 하는 도급업자로 한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다. 잘 살아보고자 부단히 노력함에도 매번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지칠 대로 지친 대니는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전 숯불 화로를 구매했다. 이것도 나름 ‘안 아프게 죽는 방법’을 검색해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심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구매한 화로를 또다시 반품하러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수증이 없다는 이유로 물건을 반품하는 데 실패하게 됐다. 자살은 물론 반품에도 실패한 대니는 몹시 기분이 상한 채로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의 운명을 뒤흔들 사건을 겪게 된다. 한 SUV 차량과 충돌할 뻔했는데 도리어 차주 에이미 라우(앨리 웡 분)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고 손가락 욕까지 시전한 것이다. 그 순간 꾹꾹 눌러왔던 대니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버렸다. 아니, 꾹꾹 눌러왔던 분노를 ‘대니가’ 폭발시켜버렸다. 그렇게 대니와 에이미의 끝없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두 사람에게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꼴보기 싫은 서로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을 뿐이다. 그리고 밑바닥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문득 서로가 너무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다. “네가 내 머릿속에 있는 느낌이야”라고 말할 정도로 마치 거울을 보듯 서로를 보게 된 두 사람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연히 터진 분노로 두 남녀가 서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 담긴 이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이다.

▲(연합뉴스)
‘성난 사람들’은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감독이 집필 및 연출한 시리즈물로 한국 이민자 2세 대니와 성공한 사업가 에이미가 난폭운전으로 엮이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담은 블랙 코미디 작품이다.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 피콕 극장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Limited Or Anthology Series Or Movie) 부문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을 거머쥐며 다시금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성난 사람들’ 곳곳에 이성진 감독의 경험이 녹아들어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 작가상을 받은 이성진 감독은 무대에 올라 “‘성난 사람들’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장면들은 사실 저 스스로를 반영한 장면”이라며 “그런 쇼를 많이 좋아해 주시고 개인적인 고통을 작품에 투영해주셔서 감사하다”는 특별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에미상에서 ‘성난 사람들’이 거둔 우수한 성과는 사실 예견된 결과다. ‘성난 사람들’은 지난해 4월 작품이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5주 연속 ‘넷플릭스 세계 TOP 10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재미와 작품성을 증명해낸 바 있다. 특히, 공개 직후 ‘성난 사람들’을 향한 해외 매체나 평론가들의 호평이 이어졌는데 대표적으로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이 최근 데뷔한 작품 중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이고 인사이트 있는 작품인 이유는 캐릭터들의 분노가 문화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각각 다르다는 것”이라며 ‘성난 사람들’이 그려내고 있는 ‘분노’에 주목했다.

▲(출처= 넷플릭스)
뉴욕타임스의 분석처럼 ‘성난 사람들’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분노의 속성을 작품에 잘 담아냈다. 영화 곳곳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인물이 어느 인종을 대표하게 해 개별적인 특성보다 집단적인 특성에 주목하게 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오로지 아시아계 미국인들만 등장시킴으로써 각 인물을 ‘어느 집단을 대표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어떠한 사연과 감정을 가진 누군가’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전에 김이나 작사가는 ‘보통의 언어들’이라는 책에서 분노를 ‘단순히 하나의 사안으로 건드려지는 게 아닌 히스토리가 있는 감정’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김 작사가의 말처럼 분노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쌓이고 쌓이다 여과되는 구멍이 막혀 어느 순간 범람해버리는 감정에 가깝다. 이러한 분노의 특징이 작품을 이끈다. 대니와 에이미는 각각 생계, 사업 실패, 무시, 투자자의 갑질, 과도한 업무 등의 이유로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다 자신의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할 수 있는 상대인 서로를 만난다. 그리고 그 분노를 표출해 냄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마주할 기회를 얻는다. 분노 표출 정도가 지나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비극에 이르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출처=넷플릭스)
실제로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분노를 제대로 활용하면 분노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스캐롤라이나주 뉴변의 임상 정신 건강 상담사인 애쉬웨이는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 사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 안으로 파고들어 후에 죄책감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지낸 스테판 에셀 역시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제대로 활용된 분노는 개인의 정신 건강과 미래에도, 변화가 필요한 사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 표출된 분노다. 특히, 증오나 혐오를 내포하고 있는 분노는 범죄, 전쟁 등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흉기 난동 범죄’나 ‘묻지마 폭행’ 혹은 과거 나치가 벌인 ‘유대인 학살’을 예로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사회경제적 좌절 경험으로 인해 쌓인 분노가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되면 타인을 해치는 범죄로 발현된다고 입 모아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분노를 마주하고 제대로 표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분노’를 활용해 선전 정책 등을 펼치는 정치권이나 기업처럼 분노가 특정 집단의 이익 추구를 위한 저렴한 수단으로 사용돼서도 안된다.

이러한 분노의 양면성은 ‘성난 사람들’의 원제인‘ BEEF’에서도 드러난다. BEEF는 ‘소고기’, ‘불평’, ‘싸움’‘깊은 내면의 분노’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 작품을 감상한 시청자들은 제목이 뜻하는 바에 대해 ‘깊은 내면의 분노로 인해 발생한 싸움’, ‘인간의 강약’, ‘먹으면 에너지가 나게 하는 소고기처럼 일종의 증폭제 역할을 하는 분노’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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