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성 심사 소홀…금융은 책임 안져
‘지주회사 체제' 구조조정 원칙 세워야
외환위기 극복 당시 기업은 금융, 공공, 노동 부문과 같이 구조조정의 대상이었다. 당시 기업구조조정의 최대 난제는 얽히고설킨 상호출자와 지급보증이었다.
부실 덩어리 어느 한 곳을 덜어내면 멀쩡한 다른 계열기업이 부도가 나니 어느 한 곳도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문제도 더 컸다. ‘대마불사(大馬不死)’였다. 문제를 해결 못 해 뭉그적거리면 부실은 더 커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정부는 주채권 은행을 중심으로 기업회생 프로그램, 즉 ‘워크아웃’을 진행하며 최대 주주인 오너의 지분을 담보로 제출받았다.
그러면서 상호출자와 지급보증을 해소해 지주회사 시스템으로의 지배구조 전환을 권유했다. 부실이 생기면 부실 덩어리만 도마뱀 꼬리 자르듯 떼어내면 되니 구조조정이 훨씬 쉽다고 했다. 물론 버리는 회사의 문제가 그룹 전체로 전이되지는 않으니 오너들도 부담이 적다고 했다. 그러나 가공의 자본이 아니라 실재의 자금이 있어야 하기에 지주회사 구축에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태영그룹도 아마 지주회사의 장점을 읽고 많은 돈을 들여 지주회사 체제로 지배구조를 갖췄을 걸로 짐작된다.
지난해 말 아흔 살이 넘은 태영그룹의 창업주는 경영에 복귀해 채권단에 눈물을 흘리며 워크아웃을 받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가 경영에서 물러나던 때 234%였던 계열사 태영건설의 부채는 작년 말 483%로 급증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장기 차입금은 1조 원을 넘어섰고 부채로 보고되지 않은 관계기업의 PF 지급보증도 2조 4000억 원에 달했다. 경기에 예민한 것이 건설업의 특징이라 하더라도 경영은 방만했고 오너는 무책임했다.
채권단은 워크아웃 개시 조건으로 오너 일가의 사재출연이나 알짜 회사인 SBS 지분 매각까지도 요구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너 일가가 태영건설 대신 경영권을 지키는 데 계열사 지분 매각 대금을 전용한 것이 드러나 채권단의 신뢰를 떨어뜨린 탓도 있다. 금융감독원장은 “남의 뼈를 깎는 자구계획”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태영의 오너가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려 했다면 PF 업계의 한탕주의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도 문제 삼아야 한다. 2019~2022년 사이 9개 증권사의 PF 임직원에게 지급한 성과급은 8510억 원이나 된다. 당장의 과실은 따먹고 손실은 시장에 전가한 전형적 사례다. 금융은 사업성 심사라는 본연의 역할을 외면한 채 건설사 신용에 기댄 담보대출로 변질됐다. 선진 금융기법이라고는 없었다. 이자는 챙기고 이익은 나누며 손실은 뒤로 미룬 것이 금융단의 행태였다. 지주회사 체제인 태영건설의 오너에게 요구되는 사재출연이 정당화되려면 채권단 경영진의 사재출연도 워크아웃 과정에서 반드시 요청되어야 한다.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이 된 것도 의아스럽다. 태영건설은 국가기간산업체도 아니고 대형 플랜트 시공이나 수출기업도 아니다. 산업은행의 손실은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져야 한다는 점에서 도급순위 16위의 평범한 아파트 시공업체인 태영건설을 살리기 위해 혈세를 투입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다.
물론 60개에 이르는 PF 사업장, 미지급된 임금, 협력업체와 분양계약자 등을 생각하면 국민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오너들의 전횡을 미리 막고 태영건설의 건실한 경영을 책임졌어야 했다. 이것이 PF로 돈 몇 푼 더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국민경제적 역할이다.
과거 대우, STX, 금호그룹의 부실 때 오너들은 모두 사재를 출연하고 우량 계열사 지분을 담보로 제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영권을 뺏기고 우량 계열사는 지키지 못했다. 차라리 삼성자동차를 법정관리로 넘긴 삼성이 더 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부실채권은 실사 과정에서 더 부실해지고 담보 지분은 더 가격이 떨어진다. 워크아웃의 이행조건이 법정관리보다 더 가혹하다고 판단하면 부실 계열사를 둔 그룹은 워크아웃을 회피해 버릴 것이다. 지주회사를 구조조정의 모범답안으로 권유했던 정부는 이참에 오너가 있는 지주회사 체제에 맞는 구조조정의 원칙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한계기업은 더 빠르게 늘고 구조조정은 더 급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