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행정서비스 디지털화에 속도를 낸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7차 민생 토론회에서 “연말까지 420여 개를 시작으로 3년간 총 1500여 개 행정 서비스 구비서류를 완전히 디지털화할 예정”이라고 했다. “원스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도 했다.
정부는 2026년까지 단계적으로 민원·공공서비스를 행정 서류 없이 신청하는 ‘구비서류 제로화’를 추진한다. 행정·공공기관 데이터 공유가 그 중심에 있다. 오는 4월 국민 체감도가 높은 100종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고용장려금 등 321종의 구비서류를 없앤다.
인감증명제도도 110년 만에 바뀐다. 인감증명서는 부동산·자동차 거래, 금융기관 대출 등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서류다. 그러나 증명서를 과잉 요구하는 행정 편의적 작태가 국민 불편지수를 높이기 일쑤다. 정부는 2025년까지 인감증명 요구 사무 2608건 중 2145건(82%)을 정비한다. 9월부터는 온라인 민원서비스 정부24에서 인감증명 발급이 가능해진다.
국민이 매년 발급받는 민원 증명서류는 7억 건이 넘는다. 이 중 30%는 디지털화 대상이다. 약 2억1000만 건이다. 사회적 비용 절감액은 1조2000억 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천문학적 규모의 낭비를 줄이고 지구촌 건강도 챙기는 양수겸장이 될 수 있다.
장밋빛 청사진만 펼칠 계제는 아니다. 디지털화의 그늘도 여간 짙지 않다. 특히 행정 전산망 사고는 국가와 도시를 마비시킨다. 21세기의 재앙이다. 지난해 말 국가 행정망 먹통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일주일 사이 새올행정시스템 등에서 4건의 장애 증상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네트워크 장비인 라우터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조사 결과는 허망하다. 전산망 운영·유지보수를 허술히 하면 행정서비스 디지털화는 지옥으로 직행하는 급행열차를 단체로 타는 꼴이 될 수 있다.
정밀 추진이 필요하다. 인력부터 예산, 기술까지 빠짐없이 챙길 일이다. 공공 소프트웨어(SW) 사업의 대기업 참여도 늘려야 한다. 중소·중견기업 보호 명분에 대한 시대착오적 집착은 자멸적 결과를 부를 수 있다. 기업 규모가 아니라 디지털화 능력과 효율을 봐야 한다.
장애가 발생하면 즉시 다른 경로로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전산망 이원화 시스템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우회 통로도 없이 데이터를 한곳에 몰아넣고 관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경구를 왜 주식 투자에서만 찾는지 모를 일이다.
국가를 지탱하는 사회자본으론 통상 교육, 주택 같은 사회 인프라와 도로, 통신 등의 산업 인프라가 있다. 행정 전산망도 21세기의 필수적 사회자본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올해 공공부문 SW·ICT 장비 시스템 운영 및 유지관리사업 예산 규모가 전년 대비 감소했다는 소식이 있다. 사회자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는지 의문이다. 전산망 먹통 사태의 충격을 벌써 새까맣게 잊었나. 예산도 없이 ‘구비서류 제로화’는 어찌 달성하나. 디지털 정책 홍보에 앞서 실행 파일을 잘 챙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