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본지가 확보한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27민사부(재판장 손승온 판사)는 “조달청은 기획재정부와 감사원의 지시, 통보에 따라 관련 사항을 충분히 검토한 뒤 심도있는 분석, 검토를 거쳐 입찰을 취소하는 게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이라면서 조달청의 입찰취소 행위에 정당성을 실어줬다.
한국은행과 조달청의 분쟁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중구에 지하 4층, 지상 16층 규모의 통합별관 건축공사를 계획한 한국은행은 조달청에 건설업체 선정 등 입찰을 대행하는 계약을 맺는다. 공사추정금액만 3234억 원으로 입찰 단가가 적지 않은 사업이었다.
문제는 조달청이 예산보다 더 비싼 값을 써낸 계룡건설을 선택하면서 불거진다. 계룡건설은 공사추정금액을 초과하는 3359억 원을 써내고 입찰을 따냈고, 그보다 462억 원 더 낮은 2897억 원을 부른 경쟁 건설업체 삼성물산은 탈락했다.
삼성물산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기획재정부 산하 국가계약 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고, 이듬해 시민단체가 ‘조달청이 예산 낭비를 초래하는 등 업무를 부당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감사원에 공익감사도 청구했다.
논란이 커지자 조달청은 2019년 ‘감사원 조치요구사항 및 기획재정부 유권해석 반영’을 사유로 입찰취소공고를 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 통합별관 신축공사는 자연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서울 중구 삼성본관빌딩 18개 층을 대체업무공간으로 빌려 써야 했던 한국은행이 예상치 못한 임대료와 주차사용료를 지출했다며 그 일부에 해당하는 약 38억 원 물어내라는 이번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나 한국은행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달청이 입찰취소공고 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 과정에 소속 공무원의 고의나 과실은 없었다는 취지다.
조달청이 입찰취소공고를 내기에 앞서 기획재정부에 관련 문제를 두 차례에 걸쳐 질의한 당시 “국가계약법령상 예정가격 내 낙찰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추진한 것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사원으로부터 "법령상 근거 없이 예정가격을 초과해 입찰한 자를 낙찰자로 선정해 국가계약질서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고 “해당 입찰에 따를 경우 462억 원의 예산 낭비가 발생되니 관련자에게 주의를 촉구하라”는 징계요구까지 하달됐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피감기관인 조달청 입장으로서는 잘못을 명확히 지적받은 이상 해당 입찰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존 낙찰자였던 계룡건설이 '예정대로 우리 회사에 일을 맡기라'며 한국은행과 조달청을 상대로 가처분신청을 제기해 인용되면서 결론적으로 조달청의 입찰취소공고가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재판부는 조달청이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수 차례 의견을 구하고 감사원의 조사결과를 통보받아 입찰취소공고를 내는 동안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직업이나 지위에 따라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주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