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건강보험료 알뜰히 걷으면서”…정부, 건보 국고지원금 한 번도 제대로 안 내
의료체계 개선에 10조 원 이상을 투입한다는 정부의 목표가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부가 20여 년간 제대로 내지 않은 건강보험 국고지원금이 누적으로 10조 원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1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의료계는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신뢰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의료개혁에 10조 원+a 투입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의 발표가 기만적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이세라 대한외과의사회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10조 원을 들여 필수의료를 살린다고 발표했는데, 지난 20년 동안 건강보험 국고지원금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낸 적이 없다”라며 “그런 상태에서 필수의료정책 패키지와 의대 정원 증원을 이야기하니 의사들이 이를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 회장은 “정부가 내야 할 돈을 내지 않았으면서, 그보다 훨씬 적은 10조 원을 투입하겠다며 생색내는 것은 조삼모사”라며 날을 세웠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1일 필수의료정책 패키지를 발표하면서 ‘의료개혁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의대 정원을 2000명 확대하고, 필수의료 강화에 2028년까지 5년 동안 10조 원 이상을 투자한다고 공언했다. 건강보험 재원 위주로 투입하며, 일부 정부 예산도 지원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어 정부는 전날 구체적은 재원 투입 분야와 방식, 수가체계 개선 등을 발표했다. 전체 10조 원 중 5조 원 이상은 난이도와 업무 강도가 높아 의료공급이 부족한 화상, 수지 접합, 소아외과, 이식외과 등 외과계 기피 분야와 심뇌혈관 질환 등 내과계 중증 질환 분야 보상에 투입한다.
저출산 등으로 수요가 감소한 소아청소년과와 분만 등의 분야 지원액은 3조 원이다. 심뇌 네트워크, 중증소아 네트워크 등 의료기관 간 연계 협력을 통해 치료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도 2조 원을 들여 보상을 강화한다.
행위별 수가제도 하에서 정당한 보상을 산정하기 어려운 영역에 대한 공공정책수가 등 대안적인 지불제도도 마련될 전망이다. 정부는 보상체계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행위별 수가제도 중심에서 가치기반 지불제도로 혁신하기로 결정하고, 개편을 위한 '의료비용분석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부가 최근 10년간 지급하지 않은 법정 건강보험 국고지원금은 누적 약 14조 원에 이른다. 정부가 투입을 예고한 10조 원을 훨씬 웃도는 규모다.
건강보험 수입은 국민에게 징수되는 보험료 수입, 국고지원금, 기타 수입 등으로 분류된다. 국고지원금은 일반회계와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구분된다. 정부는 국민건강보험법과 국민건강증진법 등에 따라 매년 해당연도 보험료 예상수입액의 20%(일반회계 14%·건강증진기금 6%)를 국민건강보험에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해당 법률이 마련된 2007년부터 현재까지 정부는 한 번도 20%의 지원율을 지키지 않았다. 2024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올해 건강보험 예상 보험료 수입은 일반회계 기준 84조6022억 원이다. 이에 따른 법정 지원액은 11조8443억 원이지만, 결정된 실제 지원액은 이보다 1조5807억 원 적은 10조2636억 원이다.
이런 과소지원 경향은 최근 10년간 이어졌다. 2015년 건보 예상수입액은 39조7975억 원, 정부의 지원액은 5조5717억 원으로 예상 보험료 수입 대비 지원율은 14%였다. 하지만 이 비율은 2016년 12.3%, 2017년 11%로 지속해서 하락했고, 2018년에는 9.7%로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
국고 지원이 법률로 정해진 2007년 이래 지원율 20%가 지켜진 해는 한 번도 없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일반회계와 건강증진기금을 합산한 건강보험 국고 지원율은 13.6%에서 14.4% 사이를 맴돌고 있다.
그간 정부가 지원하지 않은 금액은 2027년이 지나면 영영 ‘못 받은 돈’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국민건강보험법과 국민건강증진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국고 지원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애초 건강보험 국고 지원 일몰 시한은 2022년 12월 31일까지였지만, 국회는 지난해 법 개정을 통해 시한을 5년 연장해 2027년 12월 31일로 미뤘다. 부족한 지원조차 일몰되면, 국민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가 대폭 상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서 였다.
따라서 2027년에 일몰 시한이 연장되지 않으면, 그간 누적된 국고 지원 미지급금을 지급할 근거는 사라진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법정 국고 지원 비율은 20%지만, 매년 약 14% 정도가 지원되고 있었다”라며 “국고지원법은 한시법이기 때문에 2027년에 다시 개정되지 않고 그대로 사라진다면, 더는 국고 지원을 받을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고 지원이 일몰된 이후, 미지급금이 정산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그간 누적된 미지급금은 아마 지원되지 않을 것”이라며 “여태까지 정산을 해서 지급하는 방식으로 정리된 사례가 없다”라고 말했다.
시민사회계도 정부의 건강보험 국고 지원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국고지원금은 예상 수입액을 기준으로 산정하는데, 대부분 결산을 해보면 예상액보다 많은 금액이 나온다”라면서 “직장인 등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는 월급에서 (건강보험)원천징수를 하고 연말정산도 하는데, 정부는 (국고지원금)사후 정산을 안 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필수의료에 투입한다는 10조 원을 국고지원금으로 마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라며 “기획재정부와 국회 등 넘어야 할 단계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