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달콤한 속내를 잉태하는…

입력 2024-04-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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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연필뮤지엄 관장

속씨식물은 보통 꽃 하나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지만, 오이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그래서 오이는 외롭다. 외로울 고(孤)에도 오이의 한자인 과(瓜)가 들어앉아 있다. 경상도에서는 오이를 외라고 한다. 외아들, 외골수, 외롭다 할 때의 그 ‘외’다. 외는 오이가 축약된 것일 게다.

그런데 이보다 더 외로운 것이 있다. 오이의 사촌, 참외(眞瓜, 참+오이)다. 참기름, 참사랑, 참됨의 그 ‘참’이다. 공교롭게 영어로도 ‘멜론(me+lone, 나 홀로)’이니 참외는 참말로, 진짜로, 외롭고도 적적한 과실이다.

외가 비와 바람, 어둠과 땡볕을 맞으며 외롭게 살아가는 것은 그 길만이 안에서 익어가는 성숙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성숙에 이르려면 곁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신화 속의 주인공들도 고독한 역경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난다. 달콤한 속내를 잉태하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는 것, 그것이 외의 삶이다.

고려 인조의 능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오는 청자들 중 참외모양의 병이 있다. 활짝 핀 꽃모양의 주둥이에 가느다란 목이 이어지고 이내 탐스러운 참외모양의 몸통으로 변했다간 급격히 잘록해지면서 주름으로 장식된 굽으로 이어진다. 코카콜라 병이 허블스커트 차림의 여체를 연상시키듯이 이 병 또한 아래쪽이 좁은 주름치마를 연상시킨다. 언뜻 관능을 일깨우는 몸매, 단정한 질서와 비례, 잿빛이 감도는 푸른색이 맑게 빛난다.

고려를 방문했던 북송(北宋)의 서긍은 고려의 문물에 대한 인상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 책에 “고려인들은 청색도기를 일컬어 비색이라고 부른다”라는 대목이 있다. 남송(南宋)의 태평노인은 ‘수중금’에서 “고려비색 천하제일”이라고 기술하였는데, 고려비색이란 바로, 당시 최고 수준에 이른 고려청자의 빛깔에 대한 언급이다. 갓맑은 하늘빛(비색)에 초연함과 은둔을 희구하는 고려인들의 마음이 투영되었을 것이리라.

조선에도 외로움을 벗한 이가 있었다. 경주 양동에서 출생한 회재 이언적은 이황, 이이, 송시열 등과 더불어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종사, 정치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종묘배향을 동시에 이룬 인물이다. 그에게도 영욕의 세월이 있어, 마흔 살에 정쟁에서 패하여 낙향했다. 그는 고향집이 아닌 인근의 안강으로 가서 지냈다.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은 북송의 학자 사마광이 은거했던 독락원(獨樂園)에서 따온 것이다. “귀도 눈도 폐도 장도 모두 내 소유일지니 홀로 거칠 것 없이 넓구나. 모르겠지만, 천하에 또 어떤 즐거움이 있어 이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여 이를 ‘독락’이라 한다.”

‘맹자’의 ‘진심’에는 “옛날의 어진 선비인들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자신의 도(道)를 즐기고 남의 권세는 잊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회재의 도는 학문이다. 은거하며 학문을 즐기는 것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명분이자 재충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외로움이 싫어 ‘흥청거림’이나 ‘광란의 불금’을 좇는다. 확장과 속도가 대세인 시절, 인간관계 역시 확장에 힘쓴다. 시장과 미디어도 가세한다. 외로울 땐 누군가와 수다를 떨면 우울감이 감소된다. 엔도르핀 분비가 촉진되어 심리적 고통을 완화시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통은 감소되지만 외로움의 근본 요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요히 침잠하며 자신에게 집중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자발적인 ‘왕따’도 괜찮다.

외롭다면, 아니 심심하다면 방에 앉아 참외 한 조각을 와삭 깨물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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