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R&D ‘덧칠 정책’ 경험 아닌 증명

입력 2024-04-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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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우 미래IT부장

R&D예산 삭감에 연구파행 현실화
의대증원 맞물려 이공계탈출 자극
혁신 강화해 성장동력확충 보여야

“올해 연구비가 깎이면서 심한 경우 문을 닫는 연구실까지 나오고 있는데, (중략) 후배들에게 굉장히 미안합니다.”

생명과학 분야 석학인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기초과학연구원 RNA 연구단장)가 18일 서울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이공계 활성화 대책 TF 2차 회의’에서 후배 이공계 학생들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스스로 내적 동기를 갖고 연구에 매진하는 후배들에게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문이다.

앞서 대통령실이 올해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데 대해 “연구자들에게 아픔을 드린 것도 사실”이라고 몸을 낮췄지만, 대학 이공계 연구실은 마비되고 있다. 뒤늦게 R&D 사업에 참여하는 이공계 대학원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에게 매달 연구비를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곳곳에서 연구 인력 감축과 기존 연구 파행·축소까지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정부 과제를 상대적으로 많이 수주했던 국립대와 주요 대학들은 눈앞의 실험을 제쳐놓고, 소규모 연구과제라도 따내려는 지원서 작성에 몰두하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서울대학교는 정부에서 받는 R&D 예산이 지난해보다 약 20% 줄고 학생 연구원 인건비만 200억 원이 삭감됐다. 대학 측은 전체 학생 연구원의 5분의 1인 1600명분의 인건비가 증발했다고 보고 있다.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정책과 맞물리면서 ‘이공계 대탈출’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달 초 대통령실은 총선을 앞두고 내년 R&D 예산을 역대 최대 수준으로 편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상욱 과학기술수석은 “‘R&D다운 R&D’를 위한 정부의 개혁 작업이 완결됐다고 할 수는 없다”라면서도 “절체절명의 상황에 내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각에서 말하는 예산 복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라고 덧붙였다. 연구계 반발이 거세지자, 이를 보완하는 조치로 읽힌다. 단순한 ‘예산 복원’이 아니라, 개혁이란 과제를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개혁으로 환부를 도려낸 뒤, 도전과 혁신을 선도하는 R&D로 전환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부는 한 차례도 부조리한 R&D 예산 집행 사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힘주어 말하던 ‘나눠먹기 행태’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실제 그랬다면 원인과 책임 소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지난해 6월 윤 대통령의 ‘나눠먹기식 R&D 사업 원점 재검토’ 지시 후, 최근까지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은 뒷수습을 위한 ‘덧칠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영표 KBS 축구 해설위원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홍명보 감독의 대표팀을 향해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라고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국가 R&D 사업은 1년 새 대통령 맘대로 줄였다 늘렸다 경험하는 정책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정 컨트롤타워 역할로 R&D 혁신 역량을 강화해 미래 성장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증명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미국이 글로벌 인공지능(AI) 시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파괴적 혁신’이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미국의 초거대 AI 개발사들은 박사급 AI 인재도 싹쓸이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최악의 AI 인재 유출국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미국 스탠퍼드대가 발간한 ‘AI 인덱스 2024’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만 명당 AI 인력 밀도는 0.79%로 이스라엘·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3위이지만 해외로 순유출된 AI 인재 수는 ‘-0.3명’으로 가장 많았다. 정부가 1년 만에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며 “역대 최대로 증액”으로 국가 R&D 예산에서 특단의 인재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경험이 아닌 증명의 시간이다. a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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