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시대, 소주는 이젠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닌 듯합니다. 최근 비싸진 술값으로 '서민의 술'이라는 말도 무색할 지경인데요. 퇴근길 시원하게 목을 축여주던 맥주도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외식 맥주(식당에서 파는 맥주) 소비자물가지수는 114.66으로 전년보다 6.9% 상승했습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9.7%) 이후 25년 만의 최고 수준입니다. 소주 외식 물가(식당에서 파는 소주)도 가공식품 물가상승률의 2.8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외식 소주 물가 상승률은 7.3%, 일반 가공식품 소주 물가 상승률은 2.6%였습니다. 지난해 외식 소주 물가 상승률은 2016년(11.7%) 이후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집계됐습니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소주 한 병에 3000원을 받는 곳이 있었지만, 오늘날 서울 지역 식당에선 소주 한 병 가격이 평균 5000~6000원에 달합니다. 물가가 비싼 강남에서는 소주 한 병에 7000~8000원의 가격을 매겨놓은 식당들도 발견돼 놀라움을 자아내죠.
정반대의 모습도 나타납니다. 저렴한 술값으로 '주당'들을 유혹하는 식당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거죠.
2021년부터 소주, 맥주 등 주류 출고 가격은 일제히 인상되길 반복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국내 주류 출고금액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2022년도 주류산업정보 실태 조사' 보고서와 국세청 국세통계에 따르면 2022년 국내 주류 출고금액은 전년보다 12.9% 증가한 9조9703억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2015년 기록한 직전 최대치인 9조3616억 원을 넘어선 것으로 역대 최대입니다.
주류 출고금액은 2015년 이후 감소세를 보이면서 2020년 8조7995억 원까지 줄었다가 2021년 8조8345억 원으로 소폭 늘며 증가세로 돌아선 뒤 2022년 급증했는데요.
주류 출고금액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건 2021년부터 맥주와 소주 등 주류 출고 가격이 일제히 인상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됩니다. 주류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하이트진로가 2022년 2월 참이슬 후레쉬 등 소주 제품 출고 가격을 평균 7.9% 인상했고, 롯데칠성음료도 바로 다음 달 처음처럼 등 일부 소주 제품 출고 가격을 올렸죠.
오비맥주도 2022년 3월 카스와 한맥 등 맥주 제품의 출고 가격을 평균 7.7% 인상했는데요. 하이트진로는 같은 달 테라·하이트 등 맥주의 출고 가격을 평균 7.7% 올렸습니다. 롯데칠성은 그해 11월 클라우드 맥주 출고 가격을 평균 8.2% 인상했죠. 그야말로 '릴레이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부는 주세를 인하하면서 주류 출고가도 내렸습니다. 국세청은 올해부터 국산 소주에 '기준판매비율'을 처음 도입했죠.
기준판매비율은 개별소비세 비율을 정할 때 적용하는 일종의 과세표준 할인율입니다. 해당 비율만큼 과세표준이 내려가 세금이 줄어드는데요. 소주의 기준판매비율은 22.0%로 결정됐죠. 소주의 과세표준이 22.0% 인하되면서 공장 출고가는 10.6%(132원) 저렴해졌습니다.
사실 기준판매비율 도입은 국산 주류와 수입 주류의 형평성 문제가 발단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이들 사이에는 역차별 논란이 있었는데요. 국산 주류는 반출가격을 과표로 삼아 세금을 매기지만, 수입 주류는 수입 신고가를 과세표준으로 삼아 주세를 부과합니다. 소주는 제조원가에 판매원가(광고비·인건비)와 이윤을 더한 금액, 즉 반출가격을 과세표준으로 잡고 72%의 주세율을 곱한 뒤 주세의 30%를 교육세로 또 부과합니다. 이를 모두 합친 뒤, 부가가치세 10%를 부과한 게 출고가격이 되죠. 소주 한 병에 부과하는 세금이 공장 원가보다 많아지게 되는 겁니다. 반면 수입 주류는 판매원가나 이윤을 포함하지 않은 수입 신고가와 관세만을 더한 가격에 주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국산 주류보다 과세표준이 상대적으로 낮아집니다.
이에 따라 국내 소주 제조사들도 올해 1월 1일 출고분부터 소주 출고가를 인하했습니다. 하이트진로는 희석식 소주인 ‘참이슬’과 ‘진로’의 출고가를 기존보다 10.6% 낮췄고요. 롯데칠성음료도 ‘처음처럼’과 ‘새로’의 출고가를 이전 대비 각각 4.5%와 2.7% 내렸죠. 보해양조 역시 ‘잎새주’와 ‘보해소주’의 출고가를 10.6% 인하했습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의 소줏값도 병당 최대 200원까지 내려갔습니다. 참이슬 프레시와 처음처럼은 대형마트에서 1380~1480원, 슈퍼마켓에서 1460~1690원, 편의점에서 1950~2100원에 팔리고 있죠.
그런데 식당에서 파는 술값은 변함이 없습니다. 식당, 술집 등에선 현장 반영이 안 되면서 소비자들은 가격 인하 체감을 하지 못하는 모양새죠.
식당 등지에선 주류 가격 외에 에너지 가격과 인건비, 임대료 등 압박이 커 사실상 단일 주류 가격만 낮추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읍니다. 여기에 전체 매출에서 주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가격을 섣불리 내릴 수 없다는 게 공통적인 설명이죠.
그러나 기름값과 임대료가 최근 꾸준히 내림세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판매자의 매출 욕심으로 물가가 오르는 ‘그리드플레이션’에 대한 비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년 동월 대비 석유류 상승률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1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습니다. 정부가 유류세 인하 조치를 꾸준히 시행하면서 휘발윳값은 25%, 경윳값은 37%씩 인하됐기 때문이죠. 또 전셋값은 지난해 7월부터 지난달까지 9개월 연속 -0.1~-0.9% 범위에서 마이너스 상승률을 기록하며 하락했는데요. 월세 상승률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6개월 연속 0.8%에 그쳤습니다.
소주·라면 출고가가 100원 단위로 인상됐을 땐 판매 가격을 1000~2000원씩 쉽게 올리던 식당들이 출고가가 내릴 땐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성비'를 앞세워 등장한 식당들이 소비자들을 홀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최근 전국 각지에서는 저렴한 소주·맥주 가격을 앞세워 고객 몰이에 나서는 식당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병에 4000원'이라는 문구가 주당들의 심금을 울리죠.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대학가부터 기업들이 몰려 있는 상권, MZ세대의 핫플레이스 등 곳곳에서 술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식당이 발견됩니다. 고물가 시대, 오로지 가성비만을 중시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식당들도 술값을 저렴하게 책정, 차별화를 꾀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식당은 소주를 포함한 모든 주류를 3900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정육식당인 이곳의 출입문에는 "술로 돈 벌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고기로 승부 보겠습니다"라는 야심 찬 문구가 적혀 눈길을 끄는데요. 식당을 운영하는 A 씨는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는 손님들에게 주류를 3900원에 판매하고 있다"며 "당분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밥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다른 식당도 소주를 4000원에 판매하고 있었는데요.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가성비 갑'이라는 키워드로 가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합정, 종각, 신도림 등 유동인구가 많은 다수 지역의 술집에서는 '해피 아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정 시간대에 주류를 저렴하게 판매하면서 손님을 모으는 건데요. 생맥주 한 잔을 1900원에 제공하면서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이들 술집 역시 '가성비'라는 키워드로 설명되죠.
주류로만 가격 경쟁을 벌이는 건 아닙니다. 최근 서울 강동구 한 김밥 가게에서는 김밥을 1000원에 파는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식사 시간이 아닌 오후 4시께 애매한 시간에도 1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과거와 달리 구내식당도 인기입니다. 일부러 가성비 좋은 구내식당을 찾아다니는 '원정 식객'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밥과 국, 서너 가지 반찬, 음료까지 갖춘 한 끼 식사는 만 원이 채 안 됩니다. 서울 여의도에서 직장을 다니는 B(31) 씨는 "물가가 비싼 여의도에선 평범한 점심 한 끼에 1만3000원~1만5000원가량을 쓰기 십상"이라며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회사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한 끼에 6000원도 안 해 커피까지 사 마셔도 점심에 만 원 이하로 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소재의 IT기업에 재직 중인 C(25) 씨는 "점심으로 샐러드를 자주 먹는데, 유명 프랜차이즈 제품과 구내식당의 샐러드의 맛과 질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며 "구내식당의 샐러드는 6000원 수준으로 저렴해 자주 사 먹는 편"이라고 전했습니다.
직장인의 식비 부담은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신한은행이 17일 발표한 '2024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에 따르면 월평균 소비액은 1년 새 261만 원에서 276만 원으로 5.7% 올랐는데요. 특히 소비에서 비중이 가장 큰 식비 지출이 대폭 늘었죠. 지난해 월평균 식비(64만 원)는 전년(58만 원)보다 6만 원 늘면서 60만 원 선을 넘어섰습니다.
주세 개편에도 식당 등 외식업체에서 판매하는 주류 제품 상승률이 대형마트·편의점에서 파는 가격 상승률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조사되면서, '홈술' 유행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식당과 술집 등에서 술을 사 먹기보다 편의점, 대형마트에서 구입해 집에서 술을 즐기는 유행이 확산하고 있는 건데요. 8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2022년도 주류산업정보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9~59세 성인 남녀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복수응답)한 결과 소비자들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주류 트렌드’로 ‘편의점 구입’(82.2%), ‘혼술’(59.3%), ‘홈(Home)술’(58.4%) 등을 꼽았습니다.
서민의 술이라는 소주와 맥주도 밖에서 편히 즐길 수 없는 요즘. 각자 술을 구입해 마시는 ‘혼술’과 ‘홈술’, 그리고 ‘즐기는 술’의 인기는 앞으로 길게 이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