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차 직장인 최수혁 씨(31)는 10일 오전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시중은행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해 원·엔 환율부터 확인한다고 했다. 최 씨는 “3년 넘게 들었던 적금을 해지하고 엔화 통장에 몽땅 집어 넣었다”며 “처음엔 주식에 일부 투자하고, 나머지는 일본 여행 경비로 쓰려고 했는데 환율이 계속 떨어지는 걸 보고 투자 목적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올해 초만 해도 900원을 웃돌던 원·엔 환율이 최근 870~880원대로 내려가자 추가로 엔화를 더 구매했다고 한다. 막차(저가매수)를 탄 것이다.
사회 초년생부터 노년층까지 엔화를 사서 환차익을 노리는 이른바 ‘엔테크’(엔화+재테크)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반면 정부와 수출 기업은 엔저에 좌불안석이다.
◇엔테크에 몰리는 2030세대=엔화 약세에 MZ세대들 사이에선 “예·적금보다 엔화 투자가 낫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대학생 박모 씨(23)는 아르바이트로 받은 주급을 엔화 예금에 넣고 있다. 김 씨는 “일주일에 20만 원어치씩 두 달 동안 엔화를 사 모았다”며 “뉴스를 보면 일본이 금리를 올릴 것이란 얘기가 많다. 적금해 봤자 기회비용만 날릴 게 뻔해 1년 정도 묵혀 두고 원·엔 환율이 900원대로 올라가면 파는 게 낫지 않겠나 싶다”고 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은퇴한 최모 씨(57)도 최근 원·엔 환율이 800원 원대로 덜어지자 노후자금 일부를 찾아 엔화를 샀다. 최 씨는 “재테크에 재주가 없지만, 엔회가 워낙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엔화를 구매했다”며 “엔화가 오르면 처분해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려 한다”고 했다.
20·30세대부터 노년층까지 이른바 엔테크에 나서면서 수수료를 줄이는 비결도 공유되고 있다. 박 씨는 “블로그 등을 참고해 수수료가 없는 앱을 찾아 엔화를 구매했다”고 말했다.
엔화에 몰리는 투자금 때문에 시중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은 급등세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5월 말 기준 엔화예금 잔액은 1조2893억 엔이었다. 이는 1월 말(1조1574억엔)보다 11.4%나 증가한 것이다. 올해 들어 엔화예금 잔액은 5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엔화예금 잔액도 지난해 11월부터 90억 달러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4월에는 97억1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투자자들의 시선이 다시 엔테크에 쏠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3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한 일본은행이 6∼7월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이 최근 시장에 확산됐다.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60엔에 육박하는 등 ‘엔화 가치가 바닥을 쳤다’라는 인식도 퍼졌다. 닛케이에 따르면 BOJ의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 주요 의견’에서 “정상화로 가는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언급됐다.
여름철 휴가를 앞두고 ‘엔화가 쌀 때 사두려는’ 여행객 수요도 늘었다. 수퍼엔저 덕분에 올해 일본 여행객은 급증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1분기 전체 국제선 여객(454만3517명) 가운데 일본으로 향한 여행객(186만7575명)이 가장 많았다.
◇엔저, ‘노심초사’ 기업들 =하지만 엔저는 여전히 한국 경제를 짓누른다. 당장 일본행 여행객이 늘면 여행수지 적자 폭은 더 커지고 경상수지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이미 올 1분기 여행수지 적자 규모는 10억7000만 달러나 된다. 증권가 전문가들은 “6월 이후 휴가철을 맞아 내국인의 일본 등 해외 여행객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이라며 “서비스수지 적자 확대는 올해 전체 경상수지 악화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엔저 추세가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다면 한동안 수출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5월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7% 증가한 581억5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2022년 7월(602억4000만 달러) 이후 22개월 만의 최대 실적이다. 그런데 엔저는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한국 자동차·철강 등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미국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포인트 하락하면 한국의 수출 물량은 0.2%포인트, 수출금액은 0.61%포인트 낮아진다고 분석했다.
한국무역협회 조사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나온다. 특히 유제품(0.827), 자동차·부품(0.658), 선박(0.653), 기계류(0.576)는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합도가 높다.
전문가들도 엔화의 급격한 방향전환은 없을 것으로 본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엔·달러 환율이 155엔이라는 단기 저항선을 돌파해 상승세가 가속화된 이상 다음 마땅한 저항선을 찾을 때까지는 추가 상승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