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부터 이봉창까지…일본열도 녹인 독립유공자의 뜨거운 발자취[日 독립영웅의 얼을 찾아서]

입력 2024-07-15 12:00수정 2024-07-1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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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제79주년 한달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생 해외역사탐방 3박4일 동행기

3·1 이전에 2.8 독립운동이 있었다…"'작은 불씨'가 독립 현실로"
억울하게 죽은 '관동대지진 조선 피해자'…진실 알리는 일본인들
천황 주거지 한복판에 폭탄 던진 이봉창ㆍ서상한ㆍ김지섭 의사

▲9일 도쿄 재일본 한국 YWCA 건물 입구에 비치된 '2.8독립운동 기념비' 앞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배근미 기자 athena3507@)

그동안 일본을 십수 번 가봤지만 주목적은 관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가깝고 가성비 있게 머물렀다 올 수 있는 해외 여행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독립운동가를 조부나 증조부로 둔 후손들과 광복회, 그리고 이를 지원한 롯데장학재단 관계자 등과 나흘간의 일정을 동행했다. 이를 통해 그간 배워온 일제 강점기 역사를 마치 직접 본 듯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미 방문해 본 적이 있는 가나자와와 오사카, 교토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

(이투데이 그래픽팀/손미경 기자)

◇ 3·1 이전에 2.8 독립운동이 있었다…"'작은 불씨'가 독립 현실로"

일본 도착 첫날인 9일 우리의 첫 번째 방문지는 도쿄 히비야 공원에 있는 2.8 독립 만세운동지였다. 언뜻 보면 드넓은 잔디광장과 분수대, 꽃시계 등으로 잘 꾸며져 있어 평범한 공원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이곳은 1919년 2월 12일 유학생을 비롯해 많은 한국인이 만세운동을 펼친 역사적인 공간이다.

▲도쿄 히비야공원에 있는 2.8 독립 만세운동지에서 당시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배근미 기자 athena3507@)

2.8 운동의 첫 시작점은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도쿄 '조선기독청년회관'이다. 2월 8일 한국인 유학생 600여 명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며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렸고 현장에서 60여 명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체포되지 않은 이들은 나흘 뒤인 12일 히비야 공원에 다시 모여 대한독립을 외쳤고 그 후 보름 뒤에는 한국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2.8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재일본 한국 YWCA 입구에 비치돼 있다.

◇억울하게 죽은 '관동대지진 조선 피해자'…진실 알리는 일본인들

▲ '호센카(봉선화)'에서 활동 중인 니시자키 마사오 이사가 10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진=배근미 기자 athena3507@)

이보다 억울한 죽음이 또 있을까. 이튿날 방문한 곳은 도쿄 외곽 허름한 주택가에 있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순직자 추모비'였다. 1923년 발생한 강진으로 도쿄와 가나자와 등 일본 관동지방이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그 피해 규모만 히로시마 원폭의 1만 배에 이른다. 재해 영향으로 일본 민심이 최악으로 치달은 가운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군경은 이를 명분으로 이른바 '조선인 사냥'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한국인 6000여 명 이상이 잔인하게 학살됐다. 당시 배가 부른 임산부에게는 "배 속에 폭탄이 들어있다"며 덮어씌웠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당시 참혹했던 사건 현장에서 이 사실을 안내해 준 이는 일본 시민단체 '호센카(봉선화)'에서 활동 중인 니시자키 마사오 이사다. 그는 한국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본인이 무슨 이유로 조선인 희생자 유골 발굴과 진실 알리기에 앞장서느냐는 기자 질문에 "우리가 태어난 장소에서 발생한 일인 만큼 해당 사건에 대해 전승해 나가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니시자키 이사는 또 "아직은 일본 내에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진실을 꾸준히 전달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한ㆍ일 양국 언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천황 주거지 한복판에 폭탄 던진 이봉창ㆍ서상한ㆍ김지섭 의사

이날 오후에는 천황이 산다는 도쿄 '황거(교코)'의 바깥, 황거공원(교코가이엔)을 찾았다. 현재는 관광지화가 돼 평일에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었다. 정문 앞엔 해자 위 오래된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김지섭 의사가 폭탄을 투하한 곳이다. 의열단원이던 김 의사는 도쿄제국회의 개최에 맞춰 1924년 1월 5일 오후 이곳에서 순회 중이던 순사에게 폭탄 하나를 던졌다. 이후 석교 한복판에도 폭탄 두 개를 던졌으나 불발됐다. 현장에서 붙잡힌 그는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숨을 거뒀다.

▲도쿄 황거공원 일대. 일제 강점기 당시 이 곳에서 이봉창, 서상한, 김지섭 의사가 폭탄 투하를 시도하며 대한 독립을 꾀했다. (사진=배근미 기자 athena3507@)

황거에서 폭탄 투하를 시도한 이는 김 의사뿐만이 아니다. 1920년에는 서상한 의사가 폭탄투하를 계획하다 밀고로 적발돼 옥고를 치렀고, 김 의사 의거 8년 뒤인 1932년 이봉창 의사가 황궁 정문과 인접한 일본 경시청(경찰청) 앞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당시 일왕을 겨냥한 폭탄은 제대로 터졌으나 마차에는 일왕이 아닌 궁내부 대신이 타고 있어 암살은 불발됐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이봉창 의사를 황실에서의 범죄자,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그를 처형했다.

현장 안내에 나선 황선익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을 보신 분들은 이곳 경시청 모습이 익숙하실 거다. 도쿄 경시청이 만화에도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일본인들 처지에서는 치안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항거와 경시청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졌으니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겠나. 경찰력이 촘촘히 깔린 이곳에서 자신들이 붙잡힐 것을 알고도 의거를 도모한 이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라"라고 강조했다.

◇영화 '파묘' 보는 듯…불굴 의지 속 14년 만에 찾은 윤봉길 유해

셋째 날 가나자와에서는 중국 상해 헝커우 의거, 일명 '도시락 폭탄(사실 물병폭탄)'으로 잘 알려진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를 찾았다. 노다산 전체가 공동묘지화돼 있는 다소 으스스한 곳을 한참 지나 올라가니 태극기와 함께 그의 암장지임을 나타내는 지적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복 당시만 해도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후 한국에서 온 발굴단이 일본 도쿄와 가나자와 육군묘지 등에서 독립유공자 유해 발굴에 나섰다. 그러다 묘지를 관리하던 일본인 스님의 도움으로 쓰레기더미 밑에 깔려있던 윤 의사 유해를 거둘 수 있었다. 현재 윤봉길 의사는 서울 효창공원에 잠들어있다.

▲가자나와 노다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사진=배근미 기자 athena3507@)

현재 암장지 등을 관리하는 이들은 재일교포인 박현택 윤봉길 의사 암장지 보존회 회장(월진회 일본지회장)을 비롯한 보존회 구성원들이다. 박 회장은 "윤 의사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뒀던 숙부님(암장지 초대 보존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현재에 이르게 됐다"라며 "다만 후손 세대로 접어들수록 민족성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지는 게 현실이어서 지속적인 관리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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