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한 스포츠 브랜드의 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길거리를 걷는 시민들의 신발은 물론 모자, 티셔츠, 그리고 바지에서도 이 브랜드 로고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아디다스입니다.
아디다스가 스포츠 팬들만 좋아하는, 지루한 브랜드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최근 스포츠 유니폼이나 아웃도어 의류를 활용하는 블록코어, 고프코어 트렌드는 단순 유행을 넘어 스테디로 자리 잡은 모습인데요. 여기에 레트로 '추구미'까지 더해지면서, 과거의 '힙한' 감성까지 불러낼 수 있는 아디다스가 재조명받은 겁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죠. 그렇다고 1990년대생이라면 익숙할 삼선 트레이닝복 세트를 떠올려선 안 됩니다. 최근 아디다스의 인기는 기존 아이템을 유행에 맞춰 새롭게 해석한다는 데에 차별점을 두기 때문이죠.
요즘 스니커즈 유행은 한 단어로 정리하긴 어렵습니다.
일단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전엔 '어글리 슈즈'가 패션계를 휩쓴 바 있는데요. 발렌시아가의 '트리플 S', 아디다스의 '이지' 시리즈가 대표적이었죠. 크고 투박한 모양, 발목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높은 굽이 특징이었습니다.
어글리 슈즈는 다른 사람들이 신지 않는 독특한 디자인, 개성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 게 유행이 되면서 정장이나 원피스 등에 어글리 슈즈를 신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죠.
이 못생긴 신발의 인기는 여전합니다. Z세대를 중심으로 투박한 러닝화 소비가 늘어나면서 기존에도 인지도가 높았던 뉴발란스와 아식스가 재조명받았고요. 호카, 살로몬 등은 기성 스포츠 브랜드를 위협할 차세대 브랜드로 부상했죠.
특히 아식스는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아재 신발'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디자인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신발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는데요. 일본 불매운동까지 겹치면서 악재를 맞았죠. 그러나 최근 들어 레트로 열풍과 한정판, 유명 디자이너들과의 컬래버레이션(콜라보) 전략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선 없어서 못 사는 신발이 됐습니다.
러닝화 브랜드인 호카, 스키용품 업체로 시작한 살로몬의 트레킹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초 이들 브랜드의 운동화는 '못생겼지만 편하긴 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호카의 경우 달리기 동호회에서 인기를 끌다가 오래 서서 일하는 간호사, 식당 종업원 등에게 입소문이 났습니다. 최근엔 젊은 층 중심으로 열풍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룹 뉴진스도 음악 방송에서 살로몬의 트레킹화를 착용한 바 있죠. 예전의 어글리 슈즈 유행이 러닝·등산화를 만드는 기능성 브랜드로 자리를 옮긴 모습입니다.
이와 동시에 클래식 스니커즈도 유행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글리 슈즈와 달리 날렵한 실루엣, 낮은 굽이 특징인데요. 최근 부상한 클래식 스니커즈 인기의 시작으론 아디다스 '삼바'를 꼽을 수 있습니다.
2022년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삼바'는 유행을 넘어 클래식 아이템으로 완벽히 자리매김했습니다. 국내에선 블랙핑크 멤버 제니의 사진 한 장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룩에 활용해도 잘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죠.
아디다스는 '삼바'에 이어 '가젤', '스페지알', 'SL 72' 등 다양한 모델에 대한 수요도 강세를 보입니다.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의 '2024 상반기 인사이트 리포트'에 따르면 스니커즈 거래 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브랜드도 아디다스였는데요. 1위는 '삼바'가 차지했고, 지난해 하반기 1위였던 나이키 '에어포스1 07'은 2위로 밀려났죠. 3위와 4위는 아디다스 '스페지알' 클리어 핑크, 코어 블랙 클리어 핑크 컬러가 각각 차지했습니다. 5위는 나이키 'V2K 런'이 이름을 올렸죠.
패션 디자이너들은 물론 힙합 아티스트들과의 활발한 협업,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색상 옵션도 아디다스의 레트로 스니커즈 인기를 부추기는 요인인데요. 아디다스에 이어 푸마의 '스피드캣', 오니츠카 타이거의 '멕시코 66' 등이 다시금 인기를 끌면서 클래식 스니커즈 인기를 뒷받침했습니다.
오랜 세월 시장을 주름잡아온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부터 신예 브랜드까지, 다양한 스니커즈가 유행 중인 요즘인데요. 이 같은 모습은 국내 운동화 시장의 성장에 따라 소비 행태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과거엔 운동화로 '나이키'만 떠올랐다면, 이젠 젊은 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브랜드에서 자신이 필요한 기능을 고려해 구매하는 수요가 늘고 있는 거죠. 물론 개성적인 디자인, 희소성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디다스의 인기는 신발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올봄 날씨가 조금 풀리자마자 인플루언서들의 인스타그램에는 아디다스 의류가 속속 등장했는데요. 여름을 맞아선 그 인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파이어버드 쇼츠'는 아디다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삼선과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상이 특징입니다. 운동할 때나 입을 법한 이 반바지는 최근 가장 핫한 패션 아이템인데요. 가볍고 편안하면서도 힙한 느낌을 주고, 색상과 기장이 다양해 눈을 즐겁게 하고 있죠.
헤일리 비버, 벨라 하디드 등 유명 인플루언서들의 인스타그램에서도 이 반바지를 입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운동화보다는 로퍼나 플랫슈즈, 부츠, 클로그 등 다양한 신발을 매치해 색다른 개성을 자랑하는데요. 레이스, 프릴 같은 페미닌한 상의와 함께 입으면 매력은 배가 됩니다.
그 반대로 아디다스 상의와 페미닌한 하의를 매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990년대생이라면 익숙할 '트랙탑'과 최근 유행하는 마이크로 쇼츠를 함께 입는 방식인데요. 트레이닝복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프릴 바지, 크로셰 바지 등 믹스 매치도 멋스럽습니다.
이 같은 룩이 인기를 끌며 크림 내 아디다스 트랙탑의 인기도 급등했습니다. 의류 카테고리별 순위를 보면 '재킷'에서는 1위에 나이키, 2위에 아디다스, 3위 아크테릭스, 4위 스투시, 5위 슈프림이 올랐는데요. 순위권 밖에 있던 아디다스는 트랙탑의 인기로 2위까지 단번에 올라섰죠.
사실 아디다스는 한동안 주춤한 바 있습니다. 10년 가까이 협업하던 래퍼 예(옛 카녜이 웨스트)의 유대인 혐오, 나치 찬양 발언으로 협업 브랜드 '이지' 시리즈에 타격을 입은 겁니다. 온라인상에서는 불매 운동까지 벌어졌고, 아디다스는 악성 재고를 떠안으면서 지난해엔 30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까지 기록했죠.
이에 지난해 초 9년간 푸마를 이끌던 비에른 굴덴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 반전을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기가 시들해진 '이지' 제품들은 아울렛 매장 등을 통해 처리했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등 이미지 쇄신에도 힘썼죠.
여기에 '삼바' 등 제품이 인기를 끌자 추가 색상을 내고 한정판 제품을 출시하는 등 소비자 유입에 힘썼는데요. 이 같은 노력 끝에 이미지 쇄신은 물론 매출 증가를 이끌었죠.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아디다스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올해 영업이익 10억 유로(약 1조5000억 원)를 달성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는 이전 예상치 7억 유로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애널리스트의 예상치에도 부합하는 수치인데요. 삼바 등 스니커즈 판매 실적이 호조를 보이고 '이지' 제품의 재고가 줄어들면서 매출이 증가한 데 힘입어 연간 이익 전망치를 상향 조정한 겁니다. 이번 연간 가이던스 상향 조정은 최근 3개월 사이 두 번째로 이뤄진 것이기도 했죠.
올해 2분기 매출도 지난해 동기 대비 11% 증가한 58억2000만 유로(약 8조8000억 원)를 기록해 시장 예상치를 상회했는데요. 특히 '이지' 제품을 제외하면 매출은 16% 증가했습니다. 이는 아디다스의 핵심사업이 지난해 상반기보다 '이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분석됐죠.
반면 경쟁사 나이키는 우울한 전망을 내놨습니다. 지난달 나이키는 2025 회계연도 1분기(6∼8월) 매출이 약 10%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는데요. 이는 시장조사업체 LSEG가 집계한 시장 전망치 3.2% 감소를 크게 넘어선 수치입니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나이키가 미국 내 달리기 동호회를 통한 홍보를 축소하는 대신 한정판 운동화 등의 사업에 주력하면서 러닝화 부문에서 뉴발란스 등 경쟁업체들에 입지를 내줬다고 지적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나이키가 경쟁사, 특히 가젤, 사바 등 레트로 제품을 내놓은 아디다스에 밀리고 있다고 평가했고요. 블룸버그도 "여전히 에어포스1처럼 과거 모델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며 "혁신적인 신제품이 없다"고 짚었습니다.
이는 주가에도 반영됐습니다. 올해 아디다스 주가는 25% 상승했지만 나이키는 33% 하락했는데요. '전 세계 1위 스포츠 브랜드'라는 나이키의 수식어가 무색하게 상반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