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포비아(공포)’가 번지고 있다. 지난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차량 화재가 사이렌을 울렸다. 중국산 ‘파라시스’ 배터리를 탑재한 메르세데스-벤츠 EQE 차량에서 불이 나 같은 주차장에 있던 차량 40여 대가 함께 불탔고 100여 대가 열손, 그을음 피해를 봤다. 아파트 입주민 수백 명은 일주일 넘도록 대피소에서 불편을 겪고 있다. 국민 경각심을 일깨운 역대급 사례다.
이번 화재로 드러난 전기차 결함은 경시해도 좋을 수준이 아니다. 차량 화재가 발생하면 뾰족한 진화 대책이 없다는 점부터 그렇다. 국립소방연구원의 화재 대응 가이드에 따르면 현재 사용하는 소방 장비로는 신속 진화에 한계가 있다. 소방연구원은 “온도가 1000도 이상 오르는 열폭주가 발생하면 차량 내부에서 산소와 가연성 가스가 발생해 질식소화 덮개로는 진화 효과가 없다”고 했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주변이 초토화된다. 소방연구원 실험 결과 차량이 줄지어 늘어선 주차장에서 배터리 열폭주가 발생하면 옆 차량으로 불길이 번지는 데 1분 15초가 걸렸다. 연쇄 화재를 막을 장비도, 시간도 없다는 뜻이다. 스프링클러가 정상 작동하면 그나마 손실이 준다. 하지만 이번엔 스프링클러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취약점을 가진 공동주택이 전국에 널려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국내 전기차 화재는 2021년 24건에서 2022년 43건, 2023년 72건으로 늘고 있다. 물론 내연기관 차량도 불이 날 수 있고 실제로도 난다. 하지만 전기차 화재는 피해 규모가 다르다.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 적어도 전기차 안전의 핵심인 배터리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그러나 배터리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회사는 현재로선 전무하다. 핵심 정보는 빼고 배터리 용량과 최대 주행거리만을 표시하기 일쑤다. 이번 사고 차량에 중국산 배터리가 탑재됐다는 것도 국토교통부 조사로 알려졌을 뿐 관련 회사 측은 묵묵부답이다.
정부가 다음 달 초 전기차 화재 종합대책을 내놓는다고 한다. 말의 성찬에 그치면 안 된다. 내년 2월 도입 예정인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도 하위법령 정비에 속도를 내야 한다. 특히 소비자들이 배터리 정보를 투명하게 알 수 있도록 확실한 해결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갈라파고스 규제와 거리가 멀다. 국민 안전·안심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중국은 2018년부터 배터리 이력 추적 플랫폼을 통해 제조사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유럽에선 2026년부터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 정보 공개가 의무화된다. 미국 일부 주(州)도 배터리 정보 제공을 추진 중이다. 우리만 뜸을 들일 이유도, 명분도 없다.
전기차 보급 확대 방향이 타당한지도 차제에 총점검할 일이다. 전기차 기계식 주차장 이용 확대 관련 ‘주차장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 아파트 전기차 충전시설 설치 의무화 등부터 원점 재검토가 필요하다. 배터리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국을 지뢰밭으로 만드는 최악의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정부 종합대책이 국민 안전을 돌보는 진정한 종합대책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