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
고령화 따라 재정안정 목표로 개혁
유럽의 병자서 성장엔진으로 ‘우뚝’
예나 지금이나 어렵고 힘든 백성을 돌보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이다. 과거 고구려에서 흉년 및 춘궁기에 양곡을 대여하는 진대법(賑貸法)이 있었고 이는 고려의 의창, 조선의 환곡으로 이어졌다.
과거 가난한 자를 돌보는 수단은 주로 세금이었다. 그러던 중 위험에 대비해 다수가 돈을 내고, 이 돈으로 위험에 처한 소수를 돕는 보험의 원리를 처음 도입한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19세기 후반 질병, 노령, 산업재해 등 급증하던 사회적 위험에 대응코자 1882년 질병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노령 및 폐질보험을 순차 도입했다. 이는 20세기 전반 대공황 시기 미국을 거쳐 일본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특히 국민연금은 1889년 도입 이래 1957년 아데나워 정부의 연금법 개정, 슈뢰더 정부의 독일통일 이후 2001년, 2004년 개혁과 지속적 개혁을 통해 현재에 이르렀다. 주요 변곡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데나워 정부는 전후 경제 여건은 나아졌으나 빈부격차가 심화함에 따라 급여 수준을 인상하고 국고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1957년 연금을 개혁했다. 노동자 그룹별로 지급되는 정액 급여(균등 부분)와 자신의 소득과 기여기간에 따라 지급되는 급여(비례부분)를 더해 지급되던 연금급여가 개별 기여금에 따라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연금기금이 소진됨에 따라 적립방식을 부과방식으로 변경하고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두 번째 큰 개혁은 슈뢰더 정부에서 이뤄졌다. 1989년 독일 통일 이후 서독의 연금제도가 동독까지 끌어안으며 재정부담이 급증했다. 당시 서독의 66%이던 동독 연금은 1997년 80%, 2013년 90%로 불어났다. 고령화로 노인부양비가 증가하자 슈뢰더 정부는 지속가능성, 즉 재정안정을 목표로 개혁을 단행했다.
슈뢰더 정부의 연금개혁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먼저 2001년 리스터 개혁으로 보험료 수준을 동결하고 사적 연금을 도입했다. 보험료율을 장기적으로 2030년까지 22%로 억제하는 상한 규정을 마련하고, 재원 유입의 한계로 인한 공적 연금감소를 보완하고자 국가인증의 사적 연금, 즉 리스터 연금을 도입했다. 리스터 연금은 정부승인을 받은 보험계약에 대해 보조금과 소득공제 혜택을 제공하고 임의가입하는 방식이다. 공적 연금에 리스터 연금을 더한 소득대체율은 2030년 43%를 하한선으로 명문화했다.
2004년에는 연금수령자와 보험료 납부자 수에 따라 연금의 현재가치를 조정하는 지속성 계수를 연금산정방식에 추가했다. 지속성 계수는 연금수령자가 증가하면 줄고, 취업자 증가 등 보험료 수입이 늘면 올라간다. 또한, 조기 연금 신청연령을 60세에서 63세로 늦추고, 18세 이상 청년의 직업훈련도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던 크레딧을 2009년 폐지했다. 메르켈 정부 들어서는 연금수급 개시연령이 65세에서 67세로 상향됐다.
슈뢰더 정부의 두 차례 연금개혁을 통해 다층소득보장체계도 구축됐다. 0층은 노인장애인 대상의 기초생활보장제도, 1층은 근로자와 자영업자·수공업자·예술가·광부 대상의 국민연금, 2층은 퇴직연금, 그리고 3층은 리스터 연금이다.
필자는 지난해 6월 독일 방문 당시 럴프 슈마호텐베르크 연방노동사회부 차관과 대면했다. 그는 당시 “노동시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만들고, 건강한 상태로 오래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방안”이라며 “보험료율은 국제비교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고, 한번에 올릴 것이 아니라 천천히 올리는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독일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 바꾸면서 재정지원을 더한 점, 고실업률과 고령화에 대비해 완전고용이 전제인 사회보험에 지속성 계수를 도입한 것은 모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젠다 2010’을 수립해 독일을 유럽의 병자에서 성장엔진으로 환골탈태시킨 슈뢰더 총리의 뚝심 있는 리더십도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