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환경속 재계 주도로 유치해
난관 이겨낸 선수단·기업에 박수를
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런던에 갔던 2012년, 주경기장이 있는 스트랏포드(Stratford)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필자는 “삼성”이라는 현지인들의 통화를 수도 없이 들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삼성”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그 넓은 올림픽파크에서 왜 하필 삼성이지? 이벤트를 하나?
그런데 스트랏포드에 도착해 보니 이해가 됐다. 보안검색을 거쳐 올림픽파크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가운데 삼성의 전시장이 떡하니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삼성 앞에서 만나 육상을 보러 메인스타디움에 가든가 아니면 구기 종목이 열리는 실내 경기장으로 가든가 했다. 또 삼성 앞에서 만나 이 식당, 저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몰려다니곤 했다. 지구촌 최대 축제의 한 가운데 있는 삼성이라는 한국 기업이 세계인의 이정표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삼성은 남달랐다. 신규 폴더블폰 ‘갤럭시 Z플립 6’가 연일 시상대에 올랐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딴 것은 삼성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삼성전자의 ‘빅토리 셀피’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그간 올림픽 시상식에선 공식 미디어만이 원거리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화된 환경에서 삼성은 새로운 발상을 했다. 선수들이 직접, 스스로 그 즐거움의 순간을 만끽하도록 한 것. 모든 선수(1만7000명)에게 ‘갤럭시 Z플립 올림픽 에디션’을 지급한 것은 이의 일환이다.
삼성이 올림픽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지역후원사가 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97년 IOC와 글로벌 후원사(The Olympic Partner) 계약을 체결하며 IOC 최상위 스폰서 15개 사의 일원이 됐다. 어떻게 보면 삼성의 올림픽 후원 역사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과 함께한 삼성의 도약과 궤를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경제에도 올림픽은 도약의 주요한 계기가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그저 숨 좀 돌릴 만한 수준의 그렇고 그런 작은 나라였다. 거기다 그 직전의 LA(1984년), 모스크바(1980년) 올림픽은 냉전 여파로 화합이 아니라 분열의 장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서울올림픽은 159개국이 참가한 세계 최대 축제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성적도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를 했다. 한국은 그저 그런 작은 나라에서 일약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했다. 선수보다 많은 1만5740명의 기자들이 서울올림픽을 취재했고 85개국의 160개 방송사가 연일 서울을 외쳤다. 한국이 이런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세계인들 앞에 노출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돈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국가 브랜드 제고의 기회가 됐다.
88올림픽은 한국 재계의 주도로 서울에 유치됐다. 그런데 전경련(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한 한국 대표단의 유치활동은 국내외의 냉소 속에 이뤄졌다. 정부 일각에서는 우리의 외교력으로는 단 두 표(대만, 한국)밖에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미리 책임을 전가하기까지 했다. 체육계는 올림픽은 일본에 주고 우리는 아시아 경기나 유치하겠다는 구차한 속내를 드러냈다. 한국의 IOC 위원은 다른 나라 IOC 위원에게 표를 구걸하기 싫다며 유치 총회에 가장 늦게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경제력을 키웠다. 세계와 경쟁하겠다며 마음을 다잡고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의 비관과 냉소를 이겨내고 지구촌 최대의 축제를 보란 듯이 성공리에 개최했다. 경제도, 사회도 자신감이 생기고 나라에는 도약의 큰 전기가 마련됐다.
이번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도 소위 전문가들은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예상했다. 그러나 나약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젊은이들은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로 서울올림픽 이후 최대의 성적을 올렸다. 반도체, 자동차, 전자통신에서 이미 세계 최고에 오른 한국의 기업들은 그 가능성을 믿고 젊은이들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것도 우리가 텃세를 부렸던 안방에서가 아니라 불리할 수밖에 없는 바깥에서 이룬 쾌거라 더 통쾌하고 자랑스럽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위원장을 했던 정주영 회장은 회고록에서 서운한 얘기를 했다. 올림픽 유치 때 자기 돈, 자기 시간 쓰며 열성적으로 노력한 기업인들은 자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훈장을 받지 못했는데 장관들은 별로 한 일도 없이 모조리 금탑훈장을 받았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정치나 행정의 발목잡기와 생색내기는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룬 파리올림픽에서의 성과에 선수단과 후원기업들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들의 저력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도 같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