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ㆍ前 한국경제학회 회장
기업 밸류업 추진도 본말 뒤바뀌어
실물 좋은데 주식평가 나쁠리 없어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자본을 축적하고 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금융보다 더 큰 역할을 한 산업이 또 있을까 싶다. 교실에서는 금융은 자금이 남아도는 시장참여자로부터 자금이 부족한 다른 시장참여자에게 중개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기능이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가르친다. 중개기능을 통해 금융은 자금이 가장 생산적인 용도에 쓰이도록 한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와 같이 간단해 보이는 금융이 잘 작동하지 않는 사회가 번영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자본주의는 금융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제도가 되었다.
금융이 처음 인간사회에 등장한 것은 매우 오랜전인 것 같다. 물물교환이 주류였겠지만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이 남긴 점토판 문서의 많은 양이 대차계약을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은 금융이 현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베니스의 상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고리대금업은 어느 문명에나 존재하였다. 화폐로서의 동전이 처음 주조된 것은 기원전 7세기경 지금은 터키의 서쪽 끝 지중해 연안 국가였던 리디아(Lydia) 왕국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 때부터 일종의 약속어음이 유통되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금융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거래할 수 있는 자본이 다량 축적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이 가장 먼저 축적되기 시작한 곳은 산업혁명의 종주국 영국이었다. 17세기부터 영국의 귀금속 가공업자들(goldsmiths)은 고객의 금은을 비롯한 귀금속을 보관해주면서 증서를 발행해주었다. 그리고 뒤에는 그것이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원시적인 은행과 귀금속을 기초로 한 본위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먼저 설립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 곧 최후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의 기능을 가진 중앙은행은 1694년 탄생한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이 처음이었다. 잦은 전쟁에 따른 왕실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독점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민간 주식회사였다. 영란은행이 국유화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이다. 미국에서 중앙은행이 창립된 것은 1913년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금융의 역사는 그리 긴 것이 아니다.
자금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중개하는 것이 금융의 기본 역할이지만 금융에 내재하는 위험 때문에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수많은 유형의 금융기관이 설립되고 금융상품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의 경우에는 왜 존재하는지, 보다 효율적인 곳으로 자금을 중개하고는 있는지, 위험을 분산시키고는 있는지, 혹시 자금의 중개가 아니라 금융사기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금의 중개와 효율적인 배분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현대 자본주의에 과잉금융(過剩金融)이 팽배한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고객의 자금에 대하여 높은 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고 유인하는 금융 사기꾼들이 자유로운 시장경제라는 제도를 악용하여 판을 치고 있다. 그렇다면 시장참여자들이 참고해야 할 수익률은 무엇일까? 위험 보상에 따른 수익 스프레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자와 배당을 비롯한 자금중개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평균은 결국 그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그보다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사기라고 보면 된다.
과잉금융을 염려하는 것은 금융사기에 걸려 넘어지는 선량한 투자자들이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경제 원리에 의지할 것을 권고하고 싶다. 다시 강조하지만 생산성과 효율성 이외에 그 무엇도 장기적인 고수익을 보장하지 못한다. 근래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저평가되고 있다는 주장이 득세하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그와 같은 저평가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 모양인데 이 또한 본말이 뒤바뀐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제가 효율적이고 수익이 많이 나는데 왜 주식시장이 저평가되는가? 금융만을 보지 말고 실물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