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즈볼라, 보복 다짐했지만
통신 체계·조직 사기에 치명상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 전투원들의 무선호출기(삐삐)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는 전례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전면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헤즈볼라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 전투원들이 소지하고 있던 호출기 수백 대가 이날 오후 3시 30분부터 약 한 시간 동안 일제히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헤즈볼라는 18일 “이번 폭발로 우리 대원 10명과 어린이 2명 등 최소 12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부상자는 275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NYT는 소식통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수입된 대만산 호출기 안에 미리 폭발물을 심어 터뜨렸다고 전했다. 각 호출기 배터리 옆에는 1~2온스(약 28∼56g)의 폭발물이 들어가 있었고 이를 원격으로 작동시킬 스위치 또한 내장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헤즈볼라는 대만 골드아폴로에 3000개 이상의 호출기를 주문해 레바논 전역은 물론 이란과 시리아 등 헤즈볼라 동맹국들에도 배포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감시망을 피해 휴대전화 대신 호출기를 사용하자 이를 역이용해 공격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헤즈볼라는 작년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가자전쟁이 발발한 이후 도청이나 위치 추적을 피하고자 호출기 사용을 늘렸다. 올해 초에는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 최고지도자가 이스라엘의 표적 공격 활용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휴대전화를 폐기하라고 경고했다.
소프트웨어 회사 위드시큐어의 최고연구책임자(CRO)이자 유로폴의 사이버 범죄 고문인 미코 히포넨은 “이러한 유형의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호출기가 어떤 식으로든 개조됐을 가능성이 보인다”며 “폭발의 크기와 강도를 봤을 때 단순한 배터리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설명했다.
케렌 엘라자리 이스라엘 사이버 보안 분석가 겸 텔아비브 대학 연구원은 이번 공격이 헤즈볼라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렸다고 평가했다. 엘라자리 연구원은 “이번 공격은 핵심 통신 수단을 제거했기 때문에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라며 “전에도 이러한 유형의 호출기가 표적이 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교한 공격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헤즈볼라는 이번 공격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고 보복을 천명했지만 당장 동원 가능한 전투 인원이 크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통신 체계, 조직의 사기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NYT는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기술력과 정보 수집의 우위성을 명확하게 나타냄으로써 이란과 그 대리 세력에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싱크탱크 워싱턴연구소의 매슈 레빗은 블룸버그통신에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보안 채널을 뚫었다는 점에서 이번 공격은 어떤 정의로든 매우 중요한 정보 쿠데타”라며 “이스라엘은 어떤 면에서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면전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헤즈볼라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