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ㆍ사회학
이러한 뜻에서 정부가 지난 5월 문화재청의 한계를 벗어나 국가유산청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한 정책 전환은 시의적절하다. 문화유산을 과거의 유물로 보존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벗어나, 범세계화의 흐름을 반영하여 이를 적극 활용·진흥시켜 관리하겠다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다. 답답한 정책에서 활력 넘치는 정책으로 나아가겠다는 기조 변화이다.
이에 발맞춰 우리의 안목도 바꿔야 한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5월 14일 ‘세종 이도 탄신 하례연’ 기념사를 통해 광화문 한자 현판을 한글 현판으로 바꿔 다는 논의를 시작해 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門化光’라고 쓴 현판과 세종로에 만들어진 광화문광장에 자리 잡은 세종대왕의 동상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불일치와 모순이었다. 이곳을 오가는 우리 국민은 물론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도 당황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문화유산으로 자랑하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역사와 한자로 된 현판을 보존하자는 주장을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한자 현판은 어떤 원형의 역사성도 신빙성도 갖고 있지 않다. 광화문이 건립될 때의 현판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고, 소위 원형이라고 내세우는 현판도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훈련대장이 쓴 글씨로서 그것마저 6·25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인데 미국 박물관에서 찾은 흑백사진에 나오는 이 현판의 글자를 흉내 내어 지난해에 만들어 단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원형 복원의 맹목성을 신앙해온 나머지 거짓 원형을 진품으로 착각해온 것이다.
오늘날 세종로의 광화문광장은 새 시대를 상징한다. 세계인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그 통신망에 떠오르는 대한민국의 얼굴이자 심장이다. 그러므로 한자 현판을 보고 중국의 어느 건물이나 일본의 어느 도시로 잘못 생각하지 않도록 이 광장을 우리다운 공간으로 가꾸어야 한다. 이 광장에 들어와 중국 글자와 구별되는 한글을 보고, 일제의 문자 말살 정책에도 목숨처럼 지켜온 한글의 이야기를 새기게 해야 한다. 문화유산은 ‘우리다움’의 다짐이자 그 펼침과 나눔이어야 한다. 바야흐로 이 한글은 한류를 타고 세계인에게 친근감을 주는 문자로 떠오르고 있다. 광화문의 한자 현판은 새 시대의 진운에 역행하는 지난 시대의 퇴물이다.
광화문광장은 분명 대한민국의 공간이다. 하지만 세계로 뻗어나가는 세계인 모두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까닭에 과거 회귀와 집착을 상징하는 한자 현판을 떼고 그 자리에 미래 창조와 개방을 상징하는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 대동아공영권의 허상에서 떨쳐 나와 범세계공영의 열린 세상을 추구할 새 시대의 기운을 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릇 현판이란 간단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지난 왕조 시대의 한자 현판은 유물일 뿐 새 시대를 위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좀 더 일찍 한글 현판으로 바꿔 달았어야 했다는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은 새로운 출발의 첫걸음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미룰 것 없다. 국가유산청의 발족에 발맞춰 광화문 현판을 이제 한글로 적어 당당하게 내 걸자. 한글학회와 한글 관련 단체는 한문 현판을 한글(훈민정음체)로 바꾸어 달자는 일을 추진해온 터다. 이는 미래 세대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할 우리 세대의 ‘착한 책무’이다.